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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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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잊을 만큼 생각이 나면 그때 만나요, 우리.” “어디에서요?” “이 서점이 좋겠네요.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 내가 생각나면 이곳으로 와요. 나도 그렇게 할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봄이 곧 올 거예요. 잘 지내요.”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는 일들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해지는 일들이 있다. 어느 겨울, 지예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별은 후자에 속했다. 지예의 사랑은 그해 겨울에 멈춰 서 있었다. 흐릿해지지도 않고, 잊히지도 않는 사랑은 긴 겨울밤을 덮는 애상 같아서, 늘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겨우내 내린 눈이 그 서늘한 그늘에 쌓인 채 1년 내내 녹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희미해질까. 언제쯤이면 아득해질까. 같은 생각을 곱씹으며 지나온 시간이 어느덧 5년이 넘었다. 잃어버려야만 알게 된다,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지예와 현준에겐 서로에 대한 사랑이 그랬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히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겨울은 길기만 했다. 우연히 다시 재회한 그날,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그제야 찾아왔다. 겨울 애상을 뒤로한 채. [본문 내용 중에서] “다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네요. 우린 이렇게…… 여기 앉아 있는데.”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옹이처럼 가슴에 새겨져서 잊히지도, 희미해지지도 않던 사랑을. 현준이 말했다. “오늘까지도 후회했어요, 그날 지예 씨를 잡지 않은 걸.” “잊으려고 생각했었어요. 헤어진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아니라고 해서.” “잊혀야 잊죠.” “그러게요. 그게 참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누가 그래요, 헤어진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아니라고?” “내일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날이라고 하잖아요.” 현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첫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지예 씨한테 전화했었어요.” “나한테요? 번호가 바뀌었었을 텐데.” “어떤 남자가 받더라고요. 여러 달 전에 휴대폰 번호를 변경했다고 하면서.” “나는…… 그럴 자신은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다시 만나면 또다시 헤어지게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눈 오는 날만 기다렸어요. 그건…… 현준 씨가 보여 준 여지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었나 봐요. 나, 살짝 비겁한 거 알잖아요.” “지예 씨가 왜 비겁해요? 내가 아는 지예 씨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이지.” 지예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대면해야 할 현실의 얼굴 같은 건 영영 보고 싶지 않았다.

완결 여부미완결
에피소드1 권
연령 등급전체이용가

세부 정보

팬덤 지표

🌟 로맨스 소설 중 상위 67.00%

👥

평균 이용자 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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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플랫폼 평점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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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mnail

경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는 말도 있잖아.” “길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글이네.” “길을 안 잃는 사람이 어딨어.” 십 년 가까이 편찮으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성훈은 발 디딜 땅이 꺼져 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 시달렸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그때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담담할 수 있었다. 예견됐던 죽음이었고, 숱하게 준비했던 이별이었기에. 하지만 상실을 실감하는 건 감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막막하고 막연한 감정을 외면하듯 차를 끌고 무작정 쏘다녔다. 그러다 어느덧 여행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무작정 여행을 떠난 성훈은 우연히 한적한 시골 식당에서 대학교 동기인 경주와 재회하게 된다. 몇 년 만에 만난 경주는 여전히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고, 성훈은 그녀를 통해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된다.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에 헛헛하기만 했던 마음이 차츰 따스함으로 밝아지고,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커져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성훈은 경주에게 크나큰 아픔과 상처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요즘은 여행 안 가더라?” “그러게,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너 때문이겠지. 성훈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경주가 말했다. “나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는 버릇이 많이 없어졌어.” “그게 무슨 말이야?” “화병 있는 사람처럼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되는 거 있지. 그게 며칠 동안 계속 반복되면 화를 삭이느라 여행을 갔던 거야.” “그날 거기에서 널 안 만났더라면 여전히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었을 거야.” “그러다가 어디에선가 한 번은 만나지 않았을까?” “그랬을 거야.” 그는 경주의 말이 마음에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야말로 어떻게든 만나게 될 사람들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왜 나한테 사귀자는 얘기 안 해?” “갑자기 귀가 안 들리네.” 경주는 능청을 떠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성훈이 웃으면서 말했다. “설마 안 사귀는 여자한테 같은 집에서 살자고 그랬겠어?” “그래도 난 들은 말이 없는데.” “그럴 땐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사귀자, 우리.” “이미 사귀고 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경주가 훔치듯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성훈에게 그녀가 말했다. “이 정도는 돼야 사귀는 거야. 고개는 왜 돌려?” “이렇게 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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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연애

오랜 시간 동안 비밀 연애를 해온 하나와 준오는 사내 커플이다. 그런 두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보편적인 연애를 하라고. 단순히 그녀가 상사고, 그가 부하 직원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준오보다 세 살이 더 많은 그녀는, 최근 들어 사랑하는 남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로부터 매일 결혼을 독촉 받으며 새로운 남자를 만날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제 결혼을 해야 할 나이, 그렇지만 그녀보다 어린 그는 두 명의 형이 모두 결혼한 뒤에나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하나의 부모님은 그가 아닌 ‘보편적인 남자’를 만나 ‘보편적인 삶’을 살라고 그녀를 재촉하고 있다. 도대체 보편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그가 말한다, 확신을 담아. 사랑을 담아. “내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야.” “그게 맞는 거지?”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잖아.” [본문 내용 중에서] “무슨 날이야?” 준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날은 무슨 날, 그냥 기분 내려고 온 거야.” “정말 아무 날도 아니야?” “내 생일도 아니고 권준오 생일도 아니야.” 준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내가 요즘 딱해 보였구나?” “딱하다기보다…… 대견해 보였어. 아빠하고 엄마가 내켜 하지 않는 거 알면서 그렇게 찾아다니는 걸 보니 속상하기도 했고.”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시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전과 다르게 내 입장을 많이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아.” “속도 좋지, 나는 지금도 신경질 나는데.” “이번에 찾아뵐 때는 같이 가자. 어머님도 은근히 그러길 바라시는 눈치였어.” “엄마를 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게 될 것 같아. 그래서 안 가는 거야.” “하나 씨가 어머님을 이해해야지.” “엄연히 사귀는 남자가 있는데 다른 남자하고 선을 보라는데 말이 돼? 기가 막혀서 정말.” “내 딸의 행복, 내 딸의 안정적인 삶,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게 부모 마음이야.” “어쭈! 엄마한테 세뇌 당했어?” “이해하게 된 거지.” 하나는 여유롭게 웃는 그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엄마한테 설명 좀 해 주지 그랬어, 보편적인 연애가 어떤 건지.” “그런 건 설명하는 거 아니야.” “그럼?” “차츰 보여 드리는 거지.” “차츰 보여 드려?”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차츰이라는 말이 이렇게 아름다운 말일 수 있다는 걸 하나는 처음으로 알게 됐다. 투명한 잔에 담긴 와인을 몇 모금 마신 준오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응, 차츰 차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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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미로

“오래된 얘기는 오래된 얘기일 뿐이에요.” “그럴까요?” “책장에 꽂아 둔 지 오래된 책들은 잊혀져요. 쌓이는 먼지가 그것들을 낡게 만들죠.” 7년 전, 은정의 룸메이트인 원미의 남자 친구였던 준우. 7년 전, 준우의 친구 송혁의 여자 친구였던 은정. 한때 그렇게 지나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7년 후 준우와 은정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예전에도 서로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꼈던 두 사람은 만남을 거듭하면서 점차 감정적으로 끌리게 된다. 하지만, 과거의 인연은 자꾸만 은정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마치 열두 개의 미로 속에 갇힌 것처럼.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 복잡한 미로에서 그녀를 꺼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준우밖에 없다는 것을. [본문 내용 중에서] “가끔 만나는 거 어때요?” “오해하기 좋은 말이네요.” “오해라고 생각해요?” 그는 말없이 웃으며 맥주를 마시는 은정을 바라봤다. 잔이 다 비워지고 난 뒤에야 그녀가 말했다. “난 원미하고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요. 아예 연락이 끊긴 건 2년 넘었어요.” “그 친구 안 본 지 7년째예요.” “7년이요?” “불쾌한 일이 있어서 끊어냈어요.” 은정은 잠시 갈등했다. 묻자니 구차하고 이대로 묻어 버리자니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나 때문이에요?” “그 친구 때문이죠. 사람마다 용납하고 이해하는 기준이 다르잖아요.” “그분하고 내가 헤어진 일이 계기가 됐단 얘기처럼 들려요.” “은정 씨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 그랬어도 나는 그 친구를 손절했을 거예요.” “고맙다고 해야 해요, 미안하다고 해야 해요?” “그런 얘긴 안 해도 돼요.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에 대한 대답만 해 주면 돼요.” “맥주 한 잔 더 마실래요?” “그래요.” 은정은 직원을 부르는 그의 손을 봤다. 길쭉한 손가락과 커다란 손이 야릇한 느낌을 자아냈다. 맥주를 주문 받은 직원이 가고 나자 그녀가 물었다. “가끔 만나자는 거예요, 사귀자는 거예요?” “사귀자는 얘기예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는 은정에게 그가 말했다. “사귀지 않는 사람하고 가끔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실 만큼 관대하지 못해요.” “그게 관대한 거예요?” “내 입으로 내가 헤프지 않다고 말하는 건 우습잖아요.” 은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게 말하네요.” “오래된 얘기는 오래된 얘기일 뿐이에요.” “그럴까요?” “책장에 꽂아 둔 지 오래된 책들은 잊혀져요. 쌓이는 먼지가 그것들을 낡게 만들죠.” “주말에 책장 정리부터 해야겠어요.” “오래된 책은 버려요. 언젠가는 읽을 것 같지만 안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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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치듯 그렇게

“어떤 것들은 스치듯 멀어져 가고, 어떤 것들은 스치듯 다가와서 한 사람의 전부가 되기도 하나 봐.” “그 말 좋다. 스치듯 다가와서 한 사람의 전부가 된다는 말.” “모든 것들이 스치듯 그렇게 다가와. 하지만 마지막이 될 사랑은 결코 사람을 스쳐 지나가지 않아.”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과거의 기억이 이제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바래 버린 건,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 덕분이다. 모든 것들이 스치듯 다가온다. 사람도, 감정도, 사물도, 시시콜콜하게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들까지도. 재훈 역시 그렇게 스치듯 다가온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어느새 그는 서형의 모든 것이 되었다. 절대 떠나지 않을 마지막 사랑이. [본문 내용 중에서] “내가 왜 좋았어?” “그 질문에 바로 대답이 튀어나오면 콩깍지가 벗겨진 거라던데.” 재훈이 기가 막힌 듯 웃는 그녀를 돌아봤다. “누가 그래?” “그런 말이 있대.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못하는 거래.” “그럴듯하네. 그러니까 재훈 씨는 아직까지…….” “서형 씨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어.” 재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웃음이 깊어졌다. “확실해?” “내가 내 자신한테 직접 들은 말이니까 확실하지 않을까?” 서형은 달려가 그의 등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으스러지게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열에 달뜬 눈으로 사랑을 불태우는 일은 언제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가락이 꿈틀거릴 정도로 가슴을 간질여대는 ‘그 말’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아.” “뭐가?” “재훈 씨를 만난 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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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만난 사람

“이로운 삶을 사는 여자에게 남자는 다다익선이야.” 태생적 한계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으며 사랑을 멀리하게 된 여자, 장윤서. 매주 주말마다 ‘인맥 쌓기’라는 명목으로 소개팅을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 더 이상의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서동욱,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상형? 그야 오늘 만날 여자지.” 어제 만난 여자는 의미가 없다. 어제는 그저 흘러간 시간일 뿐, 중요한 건 ‘오늘’이다. 그런 그에게 이상형은 ‘오늘 만날 여자’였다, 장윤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가가면 어떻게 돼요?” “서동욱 씨가 나쁜 놈이 되는 거죠.” “장윤서 씨는?” “나는 불쌍한 년이 되고. 봐요, 이런 얘기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 흔한 ‘밥 한번 먹자’는 이야기조차 못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할 것임을 알았기에.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이 서동욱 씨면 좋겠어요.” 그러나 만날 사람은 만난다. 사랑할 사람은 사랑한다. 사랑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절망의 순간, 그녀는 알았다. 그가 없는 삶이 얼마나 외로울지. “나한테 달아나요, 감춰 줄게요.” 절망에 빠진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알았다. 그녀가 없는 삶이 얼마나 덧없을지. 비록 그녀가 어제 만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는 늘 오늘 만날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본문 내용 중에서]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외로웠어요?”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 했어요?” 동욱을 꼭 끌어안은 채 그녀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같이 있는 기분이었어요, 계속 생각나서.” 기분 좋은 그의 웃음소리. 윤서는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동욱은 꽃잎처럼 보드레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탐스러운 가슴을 쥐락펴락하던 그의 손이 깃털처럼 허리를 간질였다. 동욱은 찰나적으로 반응하는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림을 그리듯 손가락 끝으로 허리를 어루만진 것뿐이다. 순간적으로 뜨거워진 윤서의 숨결이 그의 입안을 채웠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몸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완벽했다. 잘록한 허리와 탐스러운 엉덩이의 조화는 신비로울 정도였다. 마주 보고 누운 채 윤서에게 키스하던 그는 종잇장처럼 얄팍한 팬티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윤서의 살갗만큼 보드라운 음모가 손끝을 간질였다. “으응…….” 허리를 뒤척인 윤서가 끊어내듯 짧은 비음을 터뜨렸다. 그의 손길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또한 어색함을 느끼게 할 만큼 서투르지 않았다. 덕분에 윤서는 순식간에 달아오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흥건하게 고인 애액을 타고 동욱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음부를 자극했다. “하아!” 그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직한 신음을 토해내는 윤서의 얼굴을 바라봤다. 동욱은 발그레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윤서가 은밀한 곳을 능란하게 지분거리는 그의 팔뚝을 손으로 쥐었다. “하읏!” 동욱은 가만히 자신의 팔뚝을 잡아당기는 그녀의 요구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윤서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위로 올라온 그를 바라봤다.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윤서가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한 순간이네요.” “어떤 어색한 소리도 용납이 되는 순간이에요.” 그가 손바닥 전체로 그녀의 음부를 감싼 채 가운뎃손가락을 질구에 밀어 넣었다. “아아읏!” 허리를 들썩거린 윤서가 두 팔로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가 흡족한 표정으로 윤서를 내려다봤다. “하아, 하아…….” 가쁜 호흡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동욱이 웃었다. “봐요, 혼자인 것보다는 둘이 있는 게 낫잖아요.” “아아!” 깊게 파고들어 온 손가락이 주름진 질 벽을 세심하게 훑었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벌린 윤서가 허리를 들어 올리려는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동욱이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윤서가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는 거추장스러울 뿐인 옷을 벗었다. 절반쯤 벗겨진 채 허벅지에 걸쳐 있는 윤서의 팬티마저 벗겼다. 순간 윤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짙은 음모를 짓누른 채 배꼽에 닿을 정도로 불뚝 솟은 성기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했다. “놀랐나 봐요?” “잠깐만요…….” 동욱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그녀의 몸에 바짝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둥글게 부푼 귀두를 열기를 뿜어내는 질구에 바짝 대자 윤서가 마른 신음을 삼켰다. “으응!” “생각하지 말고 느껴요.”

thumnail

불협화음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잘 맞긴 뭐가 잘 맞아? 더럽게 안 맞지.” 10년째 연애 중인 규연과 강휘. 10년을 사귀고 연애를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역시나 둘 사이는 ‘더럽게’ 잘 안 맞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알지만, 서로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지만, 서로 맞지 않는다는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건, 그건 그만큼 서로를 잘 알고, 다른 점이 있어도 얼마든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은 어긋나는 소리가 아니라 화음(和音)이다. [본문 내용 중에서] “왜 이렇게 결혼 얘길 자주 해?” “뭐?” “사람 부담스럽게.” “부담이라니?” 그녀와의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강휘로선 규연의 말이 서운하기까지 했다. “오빠가 자꾸 재촉하는 것 같단 말이야.” “재촉이 아니라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한 이유를 세 가지만 대 봐.” 쏴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몰려온 파도가 강휘의 구두코를 덮쳤다. 그는 달아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규연을 바라봤다. 불편한, 아니, 불안한 마음이 몰려들었다. 구두코를 덮치고 달아난 파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는 거야?” 눈에 띄게 진지해지는 그에게 규연이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 “응.”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은 규연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강휘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되게 결혼이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어.” “무슨 소리야?” “오빠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은데, 나 혼자 그러는 게 부끄러워서 얘기 못하겠더라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때가 있나 봐. 어느 순간부터 언젠가는 하겠지, 그래, 나중에 하자, 이런 마음으로 바뀌었어.” “내가 너한테 실망을 준 거니?”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봤다. “내가 그런 남자하고 이 바다에 와 있을 만큼 한가한 여자로 보여?” “후우…….” “이상한 순간에 진지해진다니까.” 규연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의 팔짱을 꼈다. “오빠가 아닌 다른 남자하고 결혼하는 상상,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으니까 인상 펴.”

thumnail

썸 : 할 듯 말 듯하다가

“썸, 종료하자.”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지난주까지만 해도 멀쩡하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출장 가 있는 동안 매일처럼 네 꿈을 꿨어.” “꿈 몇 번 꿨다고 갑자기 이렇게 훅 하고 들어와?” 전 남자 친구의 친구인 준후. 그와 ‘썸’을 타며 지낸 지 어언 2년.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어 줄 것만 같던 그가 갑자기 선언한다, ‘썸’을 종료하자고. 전 남자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버림을 받은 후 또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기만 한 세인에게 준후의 ‘썸’ 종료 선언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그와 헤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녀에게 선택이란 불가능하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사랑이 두려운 여자, 정세인. 사랑 앞에서 불도저가 되는 남자 박준후. 기나긴 썸을 끝낸 두 사람의 불타는 연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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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거짓말

“보수는 얼마나 받아요?” “네?” “시간당 받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소개팅 대신 나온 거, 맞죠? 그렇게 보이는데.” 결혼한 지 여섯 달 만에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 그것도 교통사고의 가해자로. 현영은 죽은 남편을 대신해 두 다리를 다친 어린아이의 치료비를 책임지기 위해, 몸이 불편한 친정아버지의 생활비를 위해, 두 남동생의 학비를 위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쁘게 살아야만 했다. 한 푼이 아쉬운 그 시절, 친구들 대신 나갔던 소개팅이나 선 자리 아르바이트는 그녀에게 꽤 괜찮은 수입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더 이상 하지 않았던 그 아르바이트를 절친 지우의 부탁으로 다시 하게 된 현영은, 친구 대신 나간 자리에서 그녀와 닮은 듯 다른 권은훈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한 번도 괜찮지 않았지만, 늘 ‘괜찮다’는 거짓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살아왔던 그녀는 은훈을 만나며 다시 행복을 꿈꾸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괜찮냐는 말을 들으면 기계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아요. 정말 괜찮은 것처럼 말이에요.” “방어 기제 같은 거죠.” “맞아요. 그런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니까 내가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오랫동안 아프다 보면 통점이 무뎌진다고 하잖아요.” 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수십 년을 알아 온 친구들에게조차 그래 본 적 없는 말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은훈에게 털어놓고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은훈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길지 않은 침묵 뒤에 은훈이 물었다. “그릇은 어떻게 했어요?” “팔았어요. 갖고 있으면 계속 생각날 것 같아서요.” “잘했네요.” “저 이런 얘기, 지우한테도 못했어요.” “지우 말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하던데요.” “지우한테는 미안해서 힘들다는 내색을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지우, 잘 아신다면서요. 그때 그 사고가 났을 때, 나는 정신을 붙들려고 기를 썼는데 지우는 병원에서 울다가 기절했어요.” “!” “그런 친구한테 힘들다는 말을 하는 건 죄예요.” “나한테 해요.”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지금처럼 한 번씩 하소연할게요. 지난 일인데,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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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다시 올 것 같아서

“봄이 다시 올 것 같아서 기다리게 되네.” CC로 만나 6년 동안의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봄과 정훈. 그러나 두 사람은 뜻밖에도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이혼 사유는 소통의 부재. 6년 동안 들인 공이 그렇게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려 버렸다. 이혼하고 한동안은 서로를 욕하며, 원망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결혼식장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하고 이따금씩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그저 그렇게, 과거의 기억은 저 멀리 묻은 채 친구처럼, 아는 지인처럼. 하지만, 직장에서 일방적으로 봄에게 호감을 표하는 상사를 피해 운전기사를 자처한 정훈의 차를 타고 매일매일 같이 퇴근하면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향해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느끼게 되는데……. 길고 긴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봄은 다시 돌아올까? [본문 내용 중에서] “손잡아도 돼?” 정훈이 그녀를 바라봤다. 봄이 중얼거렸다. “무안하게 쳐다보기는.” “이번에 잡으면 안 놓을지도 몰라.” 미지근한 대답과 달리 정훈은 어느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봄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 봐, 덜 춥잖아.” “춥지?” “참을 만해.” 정훈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차가운 강바람과 달리 그의 손은 따뜻했다. 봄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정훈의 입술이 입술에 닿는 순간 오히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으슥한 밤, 도서관 건물 뒤에서 첫 키스를 하던 그날처럼 가슴이 떨렸다. 입술을 포갠 두 사람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흔하디흔한 입맞춤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키스 역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귀찮기까지 한. 입술과 입술이 닿은 순간, 봄과 정훈은 자신들이 기적의 한가운데 서 있는 걸 느꼈다. 가슴이 벅차서 부드러운 입술을 핥고 빠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봄과 정훈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팔딱이는 가슴이 짓눌릴 것처럼 밀착됐다. 펌프질하는 것 같은 심장 박동이 서로의 가슴을 두드리고 난 뒤에야 정훈은 그녀의 윗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봄은 그 바람에 벌어진 그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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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야기를 들었어

“오빠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7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도혁 오빠를 다시 만나는 순간 깨달았어, 잃어버린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덕분에 함께하는 순간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됐잖아.” 마음을 다해 서로를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도혁과 상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두 사람은, 그러나 도혁의 어머니로 인해 이별을 맞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어느 날 상은과 도혁은 서로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여전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사람은 돌고 돌아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다음에 이사할 집은 같이 보러 다니자.” 상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언제 보러 갈 건데?” 상은은 웃고 있는 그의 눈가가 붉어지는 걸 느꼈다. “곧 그렇게 하려고.” 그녀가 도혁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그는 자신을 꼭 끌어안는 상은의 등을 어루만졌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도혁이 말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을 때가 많아.” “꼬집어 줄까?” 상은이 살짝 등을 꼬집는 시늉을 하자 도혁이 나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느 누구도 너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알아, 그렇게 할 거라는 거.” “자주 생각했어, 너를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댄 그녀의 눈초리가 말갛게 젖어 들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매일 그런 생각을 해. 어떻게 하면 상은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미 행복한 걸.” “더 행복해질 거야. 내가 그렇게 해 줄 거고.” 상은은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도혁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나한테는 오빠가 내 옆에 있는 게 행복이야. 다른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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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토록, 너를……

*본 작품은 기존 출간 작품을 15세 이용가로 재편집한 개정판입니다. 이용하시는 데 참고 바랍니다.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고 하더라.” “이거 완전 또라이네!” “알면 조심해. 난 한 번 꽂히면 끝을 보는 성격이야. 잘 안 꽂혀서 그렇지.” 입만 열면 터져 나오는 거침없는 욕설, 매사에 건성건성 건들거리는 말투, 진정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든 것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그녀, 채송현. 10년이라는 시간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모습을 알지 못했다. 그날, 그 시간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계속되는 우연이 쌓이고 싸여 이제는 ‘인연’이라는 말을 믿게 될 즈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거친 말투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여린 마음을, 깔보듯 바라보는 반항 어린 눈빛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상처 입은 영혼을. 우연처럼 알게 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 순간, 매사 신중하고 조심스럽기만 하던 태진은 간데없고 도망치기 바쁜 그녀에게 저돌적으로 부딪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상처로 가득 둘러싸여 있던 너를, 그토록 아픔의 시간 속에 갇혀 있던 너를, 이제 그만 내게 허락해 줄래? * [그렇게, 그토록, 너를……]은 [어른 남자]와 연관작입니다.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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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수정

“잘못 배운 말버릇, 상대방을 무시하는 눈빛, 더럽게 재수 없는 말투, 그것부터 바로잡아 드려야겠네. 최측근 참모로서 말이지.” “무슨 헛소릴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휴……. 아버지를 봐서 한 달만 용인하겠어요.” “한 달 뒤엔 자르시겠다?” “그 안에 제 발로 걸어 나가길 바랄게요.” “말투는 재수 없고, 눈빛은 경우 없고, 생각은 무모하기까지 하네. 백수정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어?” 대종 백화점 대표 백수정. ‘마녀’라는 별명답게 안하무인에 감정조차 메마른 그녀 앞에 어느 날 참모라는 이름으로 선우혁이 나타난다. 아버지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받아들이지만, 매 순간순간 비아냥대고 이기죽거리는 그의 말과 행동에 수정은 냉정함을 잃고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내로라하는 그룹의 장손이지만, 고아 아닌 고아처럼 평생을 살아야 했던 선우혁. 좌절과 절망, 분노로 가득 찬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 백수정.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랐던 그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만, 다시 돌아와 만난 수정은 모든 것이 망가지고 엉망이 되어 버린 후였다.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서서히 그녀의 얼음벽을 깨기 시작하는데……. “난 깨진 유리 조각이야. 사납고 날카롭고 무모해. 선우혁 씨가 기억하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 “말했지, 사람은 변해도 사랑은 변하지 않는 거라고. 나한테 그걸 알게 해준 사람이 너야.” 잊을 수 없는, 아니, 평생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얼음 마녀, 백수정. 혁은 과연 그녀의 얼음을 녹일 수 있을까? [본문 내용 중에서] “수정아!” “말해.” “내가 왜 널 떠났을까?” “어제 일은 생각하지 않는 거라며.” “후후……. 그러네. 그럼 우리의 현재를 얘기해 볼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난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필요로 해. 게다가 머뭇거리기엔 너나 나나 외로움이 커.” “같이 자고 싶어?” 맥주를 마시려던 혁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을 그렇게 담백하게 할 수도 있네. 손만 잡고 자자는 뜻은 아니지?” 두 손으로 맥주병을 쥔 채 수정이 말했다. “난 못 느끼는 여자야.” “농담도 살벌하게 하네.” 수정은 웃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혁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농담처럼 들려? 농담 아니야. 못 느끼고 못 해. 그래서…….” “맥주 마셔.” 혁은 그녀가 하려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망치로 맞은 것처럼 뒷머리가 멍했다. 수정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은 아니었다. 그 말을 하던 순간, 그녀의 눈동자를 스쳐 가던 진한 절망과 분노는 마치 수정 자신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혁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내민 손을 잡는 수정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네가 어떻든 괜찮아. 이렇게 손만 잡을 수 있어도 괜찮아. 섹스 없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커플들도 있어.” “나는…….” “예전에 그토록 잘 웃고 활발하던 백수정도, 지금의 백수정도 내게는 같은 사람이야.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 네가 느끼든 못 느끼든 그조차 상관없어. 있는 그대로의 널 사랑해.” 수정이 한 손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눌렀다. 이 순간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는 혁이 고마웠다.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가 혁에게 말했다. “안아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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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연애

“너한테 실망했던 적은 한순간도 없어. 그게 내가 널 떠나지 못한 이유야. 앞이 안 보일 만큼 캄캄해서 절망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어. 이게 맞는 걸까,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숱하게 흔들렸어. 그런데 너는 소나무 같더라. 안 흔들려, 너무 우직해. 그때마다 깨닫게 되더라. 내가 이 남자를 떠나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지? 내가 견딘 게 아니라 네가 나를 견디게 해 준 거야.” 선준과 해수는 12년째 연애 중이다. 작은 소도시 출신의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두 사람의 부모 역시 그곳 토박이로 평생을 서로 알고 지냈다. 그러나 각자의 이유로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부모님들로 인해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고,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반대는 이어져 여전히 두 사람은 연애 중이다. 오랫동안 연애를 하면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시련이 많은 사랑 역시 좋은 사랑은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가끔씩은 흔들리고, 가끔씩은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헤어질 수 없었던 건,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음 덕분이었다. 이제 오랜 시간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떠나는 둘만의 여행, 선준은 그녀에게 말한다, 평범한 연애란 한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우리야말로 정말 아주 평범한 연애를 했노라고. [본문 내용 중에서] “너한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었어.”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축복……. 축하……. 그리고 인정……. 반대와 홀대가 아닌 그것들을 주고 싶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양가 부모님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해수가 그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한테 가장 좋은 건 너라는 사람이야. 너 하나로 충분해.” 비록 축하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선준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어 당겼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해수도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될 줄은. “아니, 그 시간도 나한테는 행복이었어. 사랑해.” 그녀가 두 팔로 선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포개진 둘의 몸이 서로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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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그대를

“기대했던 것 이상이야.” “뭘 기대했는데요?” “좋은 사람일 거라고 기대했는데, 내가 좋아하게 될 사람일 줄은 몰랐어.” 정략결혼을 위한 맞선은 아니었다. 그저 안정적인 방법으로 결혼할 사람을 만나길 원해서 나온 것일 뿐.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신중한 건 아니다. 함께한 시간이 오래됐다고 해서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건 더더욱 아니다. 씁쓸하다 못해 역겨운 사랑의 기억은, 그것들에 관한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길 원했고, 되도록 안정적인 관계이길 바랐다. 서로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그런 관계이길 바랐다. 그런 이준에게 은성은 그런 은성에게 이준은 기대한 것 이상의 멋지고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다시 사랑이라는 걸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 내가, 오늘, 그대를 사랑해. [본문 내용 중에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조금 전 이준이 그랬던 것처럼 은성 역시 그가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해 봐요.” “좋지 못한 일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 일로 인해 사랑을 불신하거나 부정하진 않아.” 은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그의 말에 희열을 느끼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폐부를 가득 채운 공기 같은 감정은 분명 희열이었다. “은성 씨 말처럼 나 역시 안정적인 방법으로 결혼할 사람을 만나게 되길 바랐어.” “와 닿는 표현이네요.” “와 닿아?” “안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안정적인 방법을 원했던 거, 맞아요.” 그 안정적인 방법으로 만난 남자가 이처럼 가슴을 설레게 할 줄은 몰랐다. 함께 이런 마음, 이런 눈빛을 주고받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이 확신에 대해, 그리고 선택에 대해 끝까지 책임질 거야.” 은성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꼭 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따스해 눈이 감기려고 했다. “나도 지금 내가 이준 씨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대해…….”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문을 연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준의 입술이 스치듯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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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선 남녀

“생각할 시간을 갖자.” “무슨 생각?”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생각. 너도, 나도 행복하지 않아. 그만 불행했으면 해.” 연애한 지 3년 반. 어느덧 서로에게 무심하고 차갑게 변해 버린 그와 그녀. 더 이상 가슴 떨리는 설렘도, 서로에 대한 기대도 없이 그저 의무적으로 전화하고, 만나고, 관계를 맺고. 그런 권태로운 시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예진은 성훈에게 시간을 갖자고 이야기하고, 그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 역시 동의한다. 생각을 갖자는 말…… 사실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는 것임을 알면서도 권태로운 관계를 이겨낼 수 없어,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다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소개팅 자리에 나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보게 되고, 그제야 알게 된다, 그들은 한 번도 이별한 적이 없었음을. 사랑에 있어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불같은 사랑의 시간이 지나고 권태기를 맞이한 예진과 성훈. 두 사람은 권태기를 극복하고 다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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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모퉁이를 돌면

“우리, 사귄 것보다 헤어져 지낸 시간이 훨씬 더 길어요.” “그 7년 동안 매 순간 실감했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걸.” “…….” “기억도 길 같아서 어떤 기억들은 모퉁이를 돌기도 하잖아. 내 기억의 모든 모퉁이에는 은혜, 너밖에 없었어.” 의붓언니 현주의 악랄한 거짓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은혜. 그러나 은혜에게 명헌은 오래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잃었던 적은 없었다. 사랑할 시간을 잃었던 것뿐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만난 두 사람, 아픔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긴 터널을 지나온 명헌과 은혜는 다짐한다, 이제 두 사람만의, 우리의 ‘오늘’을 살아가겠다고. [본문 내용 중에서] 몇 걸음쯤 걸었을까. 명헌이 은혜를 보며 말했다. “참아 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네.” 은혜의 걸음이 느려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여들었다. “뭘 참아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내가 왜 이렇게 한심한지 모르겠다.” 은혜는 쏟아지던 눈이 별안간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라도 한 것처럼 하얀 현기증이 이는 걸 느꼈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마지막으로 명헌을 만났던 날, 끝내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오빠도…… 나 좋아해요?”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명헌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봤다. 중국집 구석진 방에서 그에게 느꼈었던 서운한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왜 대답을 못해요?” 명헌은 두 눈을 감았다. 견디려 할수록 커지던 그리움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1년이 넘는 시간을 그 고통 속에서 살아온 명헌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은혜의 손을 잡았다. 북받치는 감정을 절제하며 그가 뚝뚝 끊어 말했다. “보고 싶어서, 더는, 못 참겠더라.” “!” “널 많이 좋아해.” 그를 올려다보는 은혜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언니하고 뭐가 있는 것처럼 그래 놓고…….”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왜 그랬어요? 묻지 말라면서요,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네 언니라서 그랬어.” “다시 말해 볼래요?” “안현주가 어떤 사람인지 들었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어. 네가 안현주의 동생이라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은혜는 범종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세상을 뒤흔드는 굉음이 귓가를 울리더니 이내 심장을 흔들어댔다. 셀 수 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그녀의 두 눈을 감게 했다. 명헌은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가슴에 얹는 은혜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무너지듯 은혜가 그의 가슴에 안겼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서로에게 닿는 순간, 은혜와 명헌은 달려드는 눈발처럼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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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남자, 아는 여자

*본 작품은 기존 출간 작품을 15세 이용가로 재편집한 개정판입니다. 이용하시는 데 참고 바랍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봐온, 여동생보다 더 여동생 같은 가을. 그런 가을이 그에게 ‘여자’, 그것도 사랑스러운 여자로 가슴에 새겨진 건 순간이었다. 그 뒤로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백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의 곁을 맴돌기만 했다. 그녀에게 자신은 그저 ‘오빠’일 수밖에 없었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진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그렇게 그녀는 더 이상 동생이 아닌 여자가 되어 그의 곁에 서게 되었다. 그것도 그동안 자신이 알아 왔던 ‘아는 여자’가 아닌 전혀 새로운 모습의 여자로.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던 든든한 ‘오빠’가 자신을 동생이 아닌 ‘여자’로 사랑해 왔다고 고백한 순간, 가을의 세상은 뒤집어졌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그와의 키스에 가슴 떨릴 정도의 설렘을 느끼고 흥분과 떨림 속에서 그와 하나가 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녀가 알아 왔던 오빠가 아닌 전혀 새로운 남자가 되었다. 그녀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서게 되자,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알아 왔던 ‘아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자, 그는 더 이상 그녀가 알아 왔던 ‘아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로에게 ‘아는 남자, 아는 여자’라 더욱 좋았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아는 남자, 아는 여자’여서,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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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너라서

“네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되질 않아.” “그런 건 상상하지 않아도 돼.”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내가 네 만약이야.” “맞아. 네가 내 만약이고, 내 전부인 것 같아.” 운명 공동체. 입사 동기인 재운과 희명을 일컫는 말이었다. ‘운명 공동체’라는 말처럼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호흡이 잘 맞았다, 왜 둘이 사귀지 않는지 의아할 만큼. 사실, 희명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과 큰 키에 호감 가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훈과의 이별을 원하고 있었다. 로펌을 옮기는 과정에서 보게 된 그의 부조리함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맹목적인 직진에 남자 친구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던 중 기훈의 어머니의 말도 안 되는 모욕에 희명은 그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그녀를 성공의 조건으로 보고 있는 기훈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희명을 짝사랑해 왔던 재운은 스토커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는 기훈으로부터 희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낼 것을 제안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연수원에서 널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무슨 생각?” 대학을 졸업하던 해 봄, 충주에 있는 연수원에서 입사 동기인 희명을 처음 봤다. 웃는 얼굴이 천사 같아서 자꾸 쳐다보게 됐었다. “널 좋아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 “내색도 안 했으면서.” “같은 팀이 됐는데 굳이 내색할 이유가 없잖아. 일주일 내내 얼굴을 볼 수 있는데.” 그리고 출근을 하자마자 희명과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됐다. 상품 기획팀. 사회 초년생다운 서툰 실수를 거듭하던 그곳에서 8년씩이나 함께 근무를 했다. 운명 공동체 소리를 들어 가면서. “왜 한 번도 얘기 안 했어?” “널 볼 때마다 설레는 그 느낌이 좋았어.” “뭐라고?” “고백하고 나면 그 설레임이 반으로 줄어들 것 같았어.” “사춘기 소년이야?”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든 감이 없지는 않지.” “나 때문이야, 그게?” 기분 좋은 말을 들으면서 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희명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내가 그런 사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너라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 “다시 말해 볼래?” “너라서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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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한다고 말하면 언젠가는 너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참고 또 참고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어. 알 거야, 언젠가부터 내가 널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는 걸.”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친구 사이로 지내왔던 재후와 해영. 처음엔 그냥 친구였다, 보통의 친구. 동성 친구에게는 물을 수 없는 질문조차 편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편한 친구.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 마음과 네 마음이 같다는 것……. 하지만, 사랑을 이야기하고 나면 헤어지는 일이 더 또렷해질 것 같아서.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헤어짐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그래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될까 봐. 그러나 이제는 안다, 자신들의 관계가 확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는 걸. [본문 내용 중에서] “왜 오늘이야?” 잡은 손을 흔들며 기분 좋게 걸으며 해영이 물었다. “그러게, 왜 오늘일까?”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어제도 있고, 그저께도 있고, 날은 굉장히 많았는데 말이야.” 해영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함께했던 많은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하던 날도 있었고,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고민을 하던 때도 있었다.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재후가 말했다. “처음엔 그랬어.” “뭐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어색해서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피식 웃어 버릴 것 같았어.”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고백을 한다면…….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우리가 키스를 한다면……. 자신이 없어서라기보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머쓱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보니까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색할 만큼 너를 사랑하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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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키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역시 나를 사랑한다면, 보통의 키스를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어졌어요.” “미강 씨가 말하는 보통의 키스는 어떤 건데요?” “키스는 설레는 사이에서만 하는 거래요. 늘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키스가 하고 싶어졌다. 결혼한 사이에는 키스를 안 한다는 직장 동료의 말에 더 이상 설레지 않기 때문에 키스를 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에 마지막 키스가 언제였는지,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까마득하기만 하던 미강은 갑자기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설레서, 매일매일 할 수 있는 보통의 키스를. 그런 보통의 키스를, 오랫동안 친구처럼 지내왔던 승준과, 오래전부터 자신을 사랑해 왔다는 그와 하고 싶어졌다. [본문 내용 중에서] “오래 사귄 사이일수록 키스를 안 한다는 얘기, 들어 봤어요?” “왜죠?” “그렇게 된대요. 결혼한 사이에는 더 안 하게 되고.” 승준이 수긍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미강에게 말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를 것 같은데요.” “오늘 낮에 만났던 친구가 정리해 줬어요. 키스는 설레는 사이에서만 하는 거래요.” “미강 씨가 말하는 보통의 키스는 어떤 건데요?” “늘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키스 때문에?” 미강이 손사래를 하며 웃었다. “앞뒤가 바뀌었잖아요. 늘 설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얘기인 거죠.” “아! 늘 설레기 때문에 키스가 단절되지 않을 거란 그런 얘기였구나. 맞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설레지 않아서 키스를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뭔지 모르게 서글프더라고요.” “그래서 보통의 키스라고 했군요. 무슨 말인지 이제 이해됐어요.” 미강은 그에게 나는 네가 고백조차 유예한 채 좋아하는 그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질투 같은 감정은 요만큼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내게도 나만의 사랑의 기준이 있다는 소리를 들먹거리는 걸로. 그녀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승준이 약간의 서운함과 허탈함을 느끼길 바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의 말에 자신이 느꼈던 허탈함만큼. 승준은 물끄러미 미강을 바라봤다. 웃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미강의 표정이 차츰 머쓱해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빤히 쳐다본 기억이 없었다. 더는 승준과 눈을 마주치는 게 난처한 그녀가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알잖아요, 내가 가끔 쓸데없는 소리를…….” “미강 씨예요, 내가 말한 그 사람.” “네?” “고백하면 멀어질 것 같아서 머뭇거리게 만든 그 사람이 미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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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하다

“열등감이라고 해두자. 극복하지 못한 패배 의식이든지.” “그거 내가 가질게.” “뭐?” “오빠가 말하는 열등감, 패배 의식 나한테 달라고. 오빠한테는 그런 거 안 어울려.” 저녁을 먹기 위해 들른 막창집에서 아주 오랜만에 선배의 전 남자 친구인 강훈과 재회하게 되었다. 학교 선배이자 룸메이트였던 정윤과 강훈은 누구나 부러워했던 커플이었다, 강훈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회사가 망하기 전까지는. 강훈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결혼을 약속했던 선배는 그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선배에게 버림받은 그가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강훈과의 인연은 끝났다. 그런데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안쓰러움과 연민이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도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고 사람들을 대하는 그를 보며 언젠가부터 그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날마다 그를 만나면서 그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한 발짝 다가서려 할 때마다 그에게서 뭉근한 선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다시 만난 강훈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기 시작한 슬아. 그녀는 과연 그와 연애, 할 수 있을까? [본문 내용 중에서] “나, 오빠 좋아해.” “거기까지만 하자.” “내가 부담스럽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내가 오빠의 지난 시간을 알아서?” “그것도 한 가지 이유일 수 있고.” 슬아는 정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기를 썼다. 어떤 이유가 있어도 강훈에게 아픈 기억을 더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정윤이 때문만은 아니야.” “…….” “사람들을 봤어.” “어떤 사람들?” “태한 실업 기획실에 근무하던 서강훈과 막창집 사장 서강훈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 아니,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게 오빠한테 의미가 있는 일이야?” “친했던 친구들 역시 그랬던 것 같아.” 슬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말한 ‘그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연거푸 두 잔의 술을 마시고 나서야 그가 말했다. “너한테 그 길을 같이 가자고 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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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에 첫사랑이 산다

“혹시, 저하고 구면이세요? 뻔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고…….” “네 오빠 친구.” “정말이에요?” “최유찬 동생 최유하.” 결혼을 앞둔 오빠의 여자 친구로 인해 강제로 독립을 하게 된 유하는,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무려 강남에 대출 한 푼 없이 고급스러운 빌라를 사게 된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그래서 더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유하는,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옆집 남자가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에게 자신을 아느냐고 묻는 순간, 같은 고등학교 졸업생이자 오빠의 친구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럼에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옆집 남자를 오빠와의 통화를 통해 그제야 기억해낸다. 그렇게 옆집 남자 석훈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울리는 현관 벨소리에 유하는 깜짝 놀라게 되고, 20여 일 동안 계속되는 한밤중의 테러 아닌 테러에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는 석훈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오빠,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 “너한테 줄 게 있어.” 유하와 석훈이 동시에 말했다. 대답은 유하가 빨랐다. “뭔데?” 석훈이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꺼낸 무언가를 유하의 앞에 내려놨다. “열어 봐.” “뭘…… 까?”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목이 마르기도 했다. 유하는 얼른 와인을 마셨다. 물을 마시듯 벌컥. 그리고는 석훈이 내민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반짝이는 목걸이가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오다가 주웠다, 그런 소리는 못하겠고, 지나가다 눈에 보이기에 샀어.” “왜 샀는데?”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유하가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석훈은 나직이 웃고 말았다. “정말 예쁘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지.” 기쁜 얼굴로 목걸이를 이리저리 보는 그녀에게 석훈이 물었다. “묻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없어.” “응?” “없어졌어.” 석훈이 목걸이를 내미는 순간, 아니, 네게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고 말하는 순간, 유하에겐 자신들의 관계를 물을 이유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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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을 만나면

“같은 회사에서 두 번씩 사내 연애를 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에요.” 3년 동안 사내 연애를 했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더 이상 남자도, 미래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연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던 그 남자가 그녀와 헤어지고 몇 달 만에 운명적인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믿고,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또다시 사내 연애를 할 생각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운명 같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널 만나고 꿈이라는 걸 꾸고 싶어졌어, 행복이라는 꿈을.” 사기 결혼, 말로만 듣던 그것의 피해자가 된 뒤 여자도, 사랑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사고라고 생각하려 해도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상처는 조금씩 그를 좀먹어 갔다. 인생에 더 이상 여자도, 사랑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앞에 나타난 예준은, 그로 하여금 믿음도, 사랑도, 행복도, 미래도 꿈꿀 수 있게 해준 ‘좋은 사람’이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남자 친구, 안 필요해?” “필요하죠, 절절해요…… 절절까지는 아니고, 말이 헛 나왔어요. 나이가 있으니까 필요하죠.” 그녀는 나직하게 웃는 성훈을 바라봤다. “왜 자꾸 웃어요?” “좋아서.” “뭐가 좋은데요?” 퉁명하게 말하는 척했지만 예준의 심장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도 좋고, 꿈이라는 걸 꾸고 있는 내 자신도 마음에 들고.” “꿈 얘기 되게 자주 하는 거 알죠?” “솔직히 여자라면 치가 떨렸어. 그 여자가 나쁜 거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머리로는 생각해. 아니, 머리로만 생각해.” 예준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고 같은 거였잖아요. 모르고 당했으니까.” “그런데도 트라우마가 생기네. 그래 봐야 내 손해라는 걸 아는데 말이야.”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잊어요.” “잊었어.” “잊은 사람이 트라우마가 왜 있어요?” “며칠 안 됐거든. 어떤 여자가 계속 날 웃게 하네. 재미있고 좋아서 그 여자를 보면서 웃다 보니까 행복해지고 싶어지는 거야. 덕분에 과거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졌어.” “!” 두 눈이 둥그레진 그녀에게 성훈이 말했다. “사귀자, 우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예준이 그에게 물었다. “얘기 못 들었어요?” “전 남친 얘기? 듣기도 했고, 네가 말하기도 했잖아.”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아요?” “뭐가 있어야 해? 요즘도 연락해?” “내가 미쳤어요, 그런 나쁜 놈하고 연락을 하게.” “그럼 된 거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두고두고 생각날 거야.” 성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봐, 넌 이런 식으로 날 진심으로 웃게 한다니까.” “웃겨요?” “연애 한 번도 못 해 본 그런 여자, 매력 없어. 그리고 엄연히 난 이혼남이야.” “혼인 신고도 안 했다면서 이혼남은 무슨!”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내 은사님들까지도 결혼식을 지켜봤어.” “그게 뭐가 중요해요, 사실이 중요한 거지. 그런 걸로 기죽고 그러지 말아요.” “오늘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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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me? (와이 미?)

“결혼 전까지는 순결을 지킬 생각이야. 사랑은 평생 할 수 있지만 참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아. 관계를 하는 것보다 손만 잡고 자는 게 내 자신한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잔인한 일이라는 것만 기억해 줘.” “내가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날 사귈 차례에 와서 그딴 다짐을 해?” 하필 왜, 도대체 왜! 몸도 마음도 활짝 여는 진정한 사랑을 하겠다고 다짐한 그 순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던 근사한 남자에게 고백도 받고 연인이 되어 행복하기만 한 그 순간, 그 남자는 ‘혼전 순결’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다짐을 한 걸까? 그 남자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손이 떨리고, 바라보기만 해도 키스하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은데 왜 죽을힘을 다해 참아야 하는 걸까? 그 남자 역시 나를 사랑하고, 나만 보면 키스하고, 안고 싶어 하는데 도대체 왜 그딴 다짐을 해서는 나를 남자에게 목매는 구질구질한 여자로 만드는 걸까? 도대체 왜? Why me? 순결을 고집하겠다는 남자와 그런 그의 사랑을 욕망하는 여자의 달콤 살벌한 연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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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우리는

“나하고 잘래?” 더 잘못될 건 없었다. 큰딸과 같은 나이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아버지. 버젓이 결혼식까지 올리고 사는 그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한 달에도 여러 번 히스테릭한 발작을 일으키는 어머니. 졸지에 가문의 수치 덩어리로 전락한 채 남편은 물론 시댁 어른들의 겁박에 시달리는 언니. 한마디 상의조차 없이 뉴욕 지사로 달아나 버린 남동생. 온라인 요금 고지서처럼 메신저 문자로 날아온 일방적인 파혼 통보까지.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던 회사마저 그만두게 된 본희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절망에 지쳐 버리고 말았다. 하나같이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할 뿐, 벼랑 끝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떠밀리는 자신의 처지를 염려해 주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단 한 사람, 강훈을 제외하고는. 그래서 말했다, 그에게. 하룻밤 따스한 온기와 위로가 절실했기에.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그와의 하룻밤 일탈. 그 여름 그 날,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본문 내용 중에서] “아직 멀었니?” “뭘 묻는 거야?” “아직 생각이 많아?” “생각은 늘 많지. 생각에 치이다가 끝날 것 같기도 하고…….” 강훈이 집안일에 대해 묻고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비교적 덤덤한 말투로 대꾸했다. 고개를 돌린 그가 본희를 바라봤다. “내 생각은 언제쯤 해 줄 건지 그걸 물어보는 거야.” 마주친 눈을 피하지 못한 채 그녀는 애꿎은 커피 병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일렁대는 강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가슴이 출렁거렸다. “일 년쯤 기다렸으면 됐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부족해?” “…….” 강훈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본희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쓰다듬은 것뿐인데 벗은 살갗을 어루만진 것처럼 어깨며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만 기다리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본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없었던 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강훈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서본희!” “목소리 깔지 마.”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눈동자가 출렁이는 강물처럼 깊어졌다. 일순 음험해지는 그의 눈빛이 본희를 당황하게 했다. 일 년 전 바닷가의 호텔에서 보았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샌들을 신은 발가락 끝이 긴장으로 곱고, 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말간 뺨이 흥분으로 발그레해졌다. 간질이듯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강훈이 물었다. “같이 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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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밀어내지만 마.”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심강우라는 남자일 거예요.” 어떤 이별이든 깔끔하거나 기분 좋은 이별은 없겠지만,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기까지 했던 마지막 이별을 겪은 뒤 석경은 사랑이 두려워졌다. 선뜻 누군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결같이 따스한 손을 내밀어 준 남자, 심강우. 사랑을, 만남을 두려워하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함께 걸으며 든든하게 그녀를 지켜 준 남자. 그 남자 덕분에 더는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자취 없이 진 꽃이 다시 피는 것처럼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다시 사랑하는 그 일을 주저하는 사람에게도, 영영 사랑을 하지 못할 것처럼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사랑은 피할 길 없는 봄처럼 찾아온다. 석경에게 사랑이 찾아온 것처럼. [본문 내용 중에서] “내가 석경 씨를 기다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사람들이 무슨 사이냐고, 사귀는 거 맞지, 라고 물을 때마다 대답 못하고 그냥 웃었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해. 윤석경하고 내 관계가 중요하지.” “…….” “그리고 석경 씨는 늘 내 옆에 있었어. 멀리 있지 않고.” “고맙고 미안해요.” “미안해할 것 없어. 우리에겐 우리만의 방식이 있었던 것뿐이야.” 석경이 패딩 점퍼 주머니에서 빼낸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강우는 악수를 하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에도, 석경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감돌았다. 석경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표정을 살폈다. 손을 꼭 잡던 강우가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뭐지?” “뭘까?” 석경이 그에게 두어 걸음 다가섰다. 부피감 있는 패딩 앞섶이 서로 맞닿았다. 두 사람은 맞잡은 자신들의 손을 쳐다봤다. 이 손을 잡을 수 있기까지 함께 지나온 2년이라는 시간이 강우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곁에서 사랑할 수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석경과 함께한 시간은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뭘 쥐고 있는 거야?” “알아맞혀 봐요.” 석경은 대답 대신 나직하게 웃고 마는 그의 숨소리가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옆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윤석경, 그건…….” 석경이 손가락 두 개를 그의 입술에 얹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먼저 말할 거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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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애

“오늘이 가장 좋은 것 같아.” “어제도 그 말 했잖아.” “너하고 있으면 늘 오늘이 가장 좋을 거야.” “나도 그래, 오늘이 오빠하고 연애하기 가장 좋은 날 같아.” ‘성실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서형은 사내 연애를 하며 일만큼이나 사랑에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현준을 사랑하고 믿었다. 그러나 세미한 균열로 인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 현준과 이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또 다른 회사 직원과 연애를 하며 졸지에 환승 연애를 당한 불쌍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전 남자 친구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소문까지 사내에 번지자 또다시 사랑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엄마 친구 아들 우진과 재회하게 되면서 그에게 스며 있는 여유로움과 세련됨에 반하게 된다. 자신을 향해 올곧이 다가오는 우진을 통해 비로소 오늘, 진정한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본문 내용 중에서] “오빠!” 서형은 전화를 받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놀랍도록 빨랐다. [뭐 하고 있어?] “그냥 있지.” [늦잠?] “아니야, 아까 일어났어.”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서형은 몸부림을 치다가 그랬는지 풀어진 잠옷 단추를 잠갔다. [바람 쐬러 갈까 생각 중인데 같이 안 갈래?] “대답하기 전에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 이보다 더 빠르게 뛸 수 없을 것처럼 심장이 뛰어댔다. 서형은 곧추세운 무릎으로 가슴을 받쳤다. 그리고 우진에게 물었다. “우리, 이러다가 사귀게 될 수도 있을까?” 서형이 미간을 구겼다. 그럴듯한 말도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 이런 촌스러운 말을 하다니.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도로 삼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가슴을 졸이며 우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아니라고 생각했어?] “응?” [난 우리가 다섯 번째 만났을 때, 서로 느낌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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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 하다가

“알아요?” “뭘?” “나한테 오빠는 기적 같은 사람이라는 거.” “너는 나의 미래야.” 평범하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내리막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기업의 대표이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죄수가 되고,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결혼식만 남겨 둔 미래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려졌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그렇게. 사랑으로 상처 받은 가슴을 위로하는 건 또 다른 사랑이라고 하지만, 상처 받은 가슴으로 다른 사랑을 기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 사랑이기에. 그래서 미래는 자신의 곁을 맴도는 기석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의 따스한 미소와 배려에 조금씩 마음의 빗장이 열리면서도, 또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봐 그의 마음을 받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웃음조차 잃어버린 그녀를 자꾸만 웃게 만드는 그의 사랑에 미래는 어느덧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와 사랑만 하다가 죽어도 좋을 것 같다고. [본문 내용 중에서] “왜 날 좋아해요?” 기석과 함께 카페를 찾는 이들 중에는 여자들도 제법 많았다. 예쁘고 덜 예쁘고를 떠나 그녀들 중 누구도 자신처럼 초라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같이 특유의 자신감이 흘렀다. 미래는 내심 그의 대답을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름다워서라고, 혹은 내 마음이 너를 원해서라고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삶을 견디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뜻밖의 대답이었다. 삶을 견디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니. “무슨 말이에요, 그게?” “처음 미래 씨를 봤을 때 굉장히 서툴렀어. 컵을 내려놓는 것도, 주문을 받는 것도, 하다못해 계산을 하는 것도. 기억하지?” 어떻게 그때를 잊을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좌충우돌과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찬미에게 일을 배울 땐 분명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손님을 대하면 실수부터 저지르기 일쑤였다. “처음이었으니까요.”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더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미래 씨를 봤어. 그 모습이 안쓰러운 게 아니라 경이로웠어. 이 여자, 삶에 대해 진심이구나, 그 느낌이 두고두고 생각이 났어.” 미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눈초리에 배어나는 눈물을 닦았다. 삶에 대해 진심이라는 게 이렇게나 감동할 말이 아닐 텐데 까닭 없이 눈앞이 흐려졌다. “미래 씨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더라고. 거기서부터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아.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미래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전에 했던 말…….” “사귀자는 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미래는 자신에 대한 그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미래가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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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하는 그 사람을 만나면

“잊지 못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꼭 끌어안고 놓지 않을 거야.” “또?” “고통스러운 순간조차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할 거야. 네가 없는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은 없으니까.”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영원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고 받고, 폐인처럼 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시간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실연의 아픔 속에서 허덕거리는 지혜 앞에 우연히 그 남자, 성윤이 나타난다. 그것도 쌍둥이의 보호자로. 다시 만난 그로 인해 한없이 흔들리던 그녀는, 잔인한 이별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알게 되는데……. 잊지 못하는 한 사람, 잊을 수 없던 한 사람.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본문 내용 중에서]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미안해.” 지혜가 주먹으로,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성윤은 제게 향하는 그녀의 원망을 피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너한테 나는 뭔데!” 성윤은 희고 긴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절규하는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이 바보야, 이러라고 떠난 게 아니야.” “너한테 나는 뭐였느냐고 묻잖아!” “전부니까 그런 거지!” 성윤이 찢기고 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전부? 거짓말, 하지 마! 넌 나를 휴지 버리듯 그렇게 버렸어!” “널 데리고 진흙탕 속에서 뒹굴 순 없었으니까.” “그랬겠지. 거긴 네 사람들이나 뒹굴 수 있는 그런 곳이었겠지.” “비약하지 마.” “비약? 누가 누구를 비약해? 넌 나한테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한 적 없어. 나란 사람에 대한 네 거지 같은 믿음이 거기까지였겠지.” “멋대로 생각하지 마.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야.” “나쁜 자식!” 그는 뺨을 향해 날아드는 지혜의 손목을 낚아챘다. 눈을 부라린 지혜가 잡힌 손목을 빼내려 기를 썼다. 핏발이 붉게 선 눈동자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라고 쉬웠는지 알아? 나한테 넌! 내 목숨 같은 여자였어!” “누가 목숨을 그딴 식으로 버려!” “살아야 하니까. 너라도 살아야 하니까.” “누가 그런 식으로 살고 싶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는 해? 나는 누구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쓰레기 버리듯 그렇게 안 버려! 아니, 못 버려!” 악에 받친 목소리로 견뎌 온 감정을 터뜨리던 지혜와 그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격한 숨을 내쉬었다. “놔, 이거.” 그는 잡힌 손목을 빼내려는 지혜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성윤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놔…… 후웁!” 버둥거리는 지혜의 입술이 그에게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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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 : 할 듯 말 듯하다가

“썸, 종료하자.”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지난주까지만 해도 멀쩡하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출장 가 있는 동안 매일처럼 네 꿈을 꿨어.” “꿈 몇 번 꿨다고 갑자기 이렇게 훅 하고 들어와?” “꿈속에서 섹스를 할 만큼 기다렸으면 오래 기다린 거야. 열흘 안에 결정해.” 전 남자 친구의 친구인 준후. 그와 ‘썸’을 타며 지낸 지 어언 2년.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어 줄 것만 같던 그가 갑자기 선언한다, ‘썸’을 종료하자고. 전 남자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버림을 받은 후 또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기만 한 세인에게 준후의 ‘썸’ 종료 선언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그와 헤어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녀에게 선택이란 불가능하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사랑이 두려운 여자, 정세인. 사랑 앞에서 불도저가 되는 남자 박준후. 기나긴 썸을 끝낸 두 사람의 불타는 연재가 시작된다! [본문 내용 중에서] “썸, 종료하자.” “후우!” 세인은 앞머리가 날릴 정도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벌써 2년이야.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결론을 짓자.” 영원할 줄 알았던, 영원하길 바랐던 관계에 있어 끝을 경험한 세인에겐 가슴이 답답해지는 얘기였다. “1년만 더 있다가 이러면 안 돼?” “썸의 정의가 뭔지 알아?” “뭔데?” “사귈 듯 말 듯.” 세인은 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연애 초반의 설렘 따위는 누리면서 그 이상의 진도는 제한하고 있는 상태야. 그 썸을 2년씩이나 유지했다는 건…….” “지금 나더러 이기적이라고 하려는 거지?” “아니면 내가 더럽게 이타적이든가.” 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꼭 좋은 건 제가 하더라.” “손도 잡고 싶고 입도 맞추고 싶고 같이 자고 싶어.” “야!” 정색을 한 채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보며 준후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처럼 길게 썸을 타는 사람들은 사귈 듯 말 듯이 아니야, 할 듯 말 듯이지.” “너, 미쳤니?” “열흘 줄게. 그동안 잘 생각해 봐.” 세인은 그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나이 서른둘. 언제까지 지금처럼 지낼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긴 했다. 독백하듯 처참하게 이별을 받아들인 세인으로선 아직까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4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상처의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준후와 어색한 사이가 되는 건 죽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지난주까지만 해도 멀쩡하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말했잖아, 썸 그만 타고 싶다고. 열흘 동안은 연락 안 할게.” “솔직하게 이유를 말해 봐.” “정말 알고 싶어?” “당연하지!” 세인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출장 가 있는 동안 매일처럼 네 꿈을 꿨어.” “꿈 몇 번 꿨다고 갑자기 이렇게 훅 하고 들어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준후가 말했다. “너하고 밥 먹는 꿈꾼 거 아니야.” “뭐?” 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엄청나게…….” “하지 마, 하지 마, 그런 거 구체적으로 말 안 해도 돼.” 헛기침을 한 세인이 손사래를 저었다. 준후가 그런 그녀에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꿈속에서 섹스를 할 만큼 기다렸으면 오래 기다린 거야. 열흘 안에 결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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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을 만나면

“이 차장은 사람에 대한 선이 분명한 것 같아요.” “낯선 기분이 어려워서 그래요. 낯선 사람과 어떻게 아는 사람이 돼야 하는 건지, 어느 순간부터 그게 어려워졌어요. 우습죠?”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다행스러워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거라고 대답할까 봐 걱정했어요.” 낯섦이라는 감정은 모르는 사람에게 느끼는 경계심이 아니다. 낯섦은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맺어질 것 같은 사람에 대한 경계이다. 자꾸만 눈에 밟히는 사람 말이다. 그리움이니 애틋함이니 하는 것들만 위험한 건 아니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몰랐네, 이런 사람인 걸…….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 깨달아지는 게 많아질수록 낯선 감정 또한 커간다. 사람이 낯선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될 것 같은 관계가 낯선 것이다. 아니, 두려운 것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 그것들에 대한 낯가림이 컸던 것뿐이다. 어쩌면 그건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돼 버린 마음의 반영이었던 것도 같다. 지독한 이별을 겪고 난 뒤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어떤 기대도, 믿음도 가질 수 없었던 지안은, 오랜 시간 함께 ‘일상’을 공유하며 어느 순간 낯섦을 헤치고 다가오는 우혁에게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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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을 만나면

“이 차장은 사람에 대한 선이 분명한 것 같아요.” “낯선 기분이 어려워서 그래요. 낯선 사람과 어떻게 아는 사람이 돼야 하는 건지, 어느 순간부터 그게 어려워졌어요. 우습죠?”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다행스러워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거라고 대답할까 봐 걱정했어요.” 낯섦이라는 감정은 모르는 사람에게 느끼는 경계심이 아니다. 낯섦은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맺어질 것 같은 사람에 대한 경계이다. 자꾸만 눈에 밟히는 사람 말이다. 그리움이니 애틋함이니 하는 것들만 위험한 건 아니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몰랐네, 이런 사람인 걸…….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 깨달아지는 게 많아질수록 낯선 감정 또한 커간다. 사람이 낯선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될 것 같은 관계가 낯선 것이다. 아니, 두려운 것이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 그것들에 대한 낯가림이 컸던 것뿐이다. 어쩌면 그건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돼 버린 마음의 반영이었던 것도 같다. 지독한 이별을 겪고 난 뒤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어떤 기대도, 믿음도 가질 수 없었던 지안은, 오랜 시간 함께 ‘일상’을 공유하며 어느 순간 낯섦을 헤치고 다가오는 우혁에게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나에 대해서는 궁금한 거 없었어요?” 지안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생각지 못한 순간 허를 찔린 사람처럼. “없었나 보군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상투적인 말인데요?” 장난스러운 우혁의 말에 그녀의 미소가 환해졌다. “회사에 있을 땐 몰랐던 부분들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늘 배려해 주셔서 감사히 생각해요.” “그게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였어요?” “네.” 우혁이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지안을 바라봤다. “비밀 얘기 하나 해 줄까요?” “비밀 얘기요?” 그는 지안의 눈빛에서 흔들리는 갈등의 그림자를 봤다. 누군가의 비밀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몹시 갈등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우혁이 말했다. “나는 아무에게나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네?” “모두에게 똑같이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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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연애

“1년만 만나 볼래?” “1년만 연애 비슷한 걸 하자는 거지?” “그래도 괜찮고.” “좋아, 1년이야. 그런데 조금 웃기지 않니?” “뭐가 웃겨?” “연애 비관론자 둘이서 뭐 하는 거니.” 사랑 따위, 연애 따위 개나 주라지! 도통 연애에는 관심조차 없던 연애 비관론자 은형과 승완. 서로의 취향이나 가치관, 생각조차 잘 맞는 두 사람은 ‘절친’이 되지만, 너무나 닮은 둘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달랐다. 어딜 가나 연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은형과 승완은 ‘그럼 연애 비슷한 거라도 해볼까?’라는 마음에 1년짜리 ‘계약 연애’를 시작한다. 언제든 다시 친구로 쿨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계약 연애, 그러나 끝이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이 막연함과 두려움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본문 내용 중에서] “하, 흐읏!” 쾌락으로 일그러진 얼굴. 승완은 신음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정수리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하으! 흐으!” 열에 달뜬 채 초점을 잃은 눈동자, 달아오른 살갗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그런 것들만큼 승완을 취하게 하는 건 없다. 욕망으로 미쳐 날뛰는 페니스를 삼킨 질 벽이 경련을 하듯 주름진 속살을 떨어댔다. 엉덩이를 뒤로 물린 승완이 힘껏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은형이 온몸으로 자지러졌다. “흐, 흐응…….” 머리카락에서조차 느껴지는 잔열(殘熱). 열정에 물든 그녀의 모습은 매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승완의 심장을 흔들었다. 탄탄한 가슴에 짓눌린 거뭇한 유두가 사정없이 비틀렸다. 퍼억! 철퍼억! 질척한 소리를 내며 검붉은 페니스가 쉴 새 없이 꽂혀 들었다. “하아!” 탄성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르는 은형의 얼굴이 온통 붉은빛을 띠었다.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저벅대며 다가오는 이별의 소리. 막막하기까지 한 그것들을 떨쳐내려는 듯 은형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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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은 처음이라서

“사랑해.” “이런 사랑은 처음이지?” “처음이야. 그리고 마지막일 거야.” 한 번도 비혼을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가족들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비혼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그녀가 비혼주의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가족들의 성화에 해수는 어쩔 수 없이 선 자리에 불려 나가게 되고, 그러다 운명처럼 그 남자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입사 동기의 친구인 수찬을. 결혼을 전제로 동거했던 여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뒤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던 수찬과 때로는 아픈 사랑을, 때로는 지질한 이별을 경험했던 해수는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이 사랑 역시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은 선본 사람들 같지 않게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 온 사람처럼 급속하게 친밀해지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다시 말해 봐.” “커피 마시자고.” “그거 말고.” “못 들은 사람처럼 왜 그래.” “한 번만 더 해 봐.” “예뻐.” “뭘 해도?” “응.” “사람 가슴 설레게 하는 것도 여러 가지네. 수찬 씨는 상상도 못할 걸.” “뭘?” 수찬은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녀를 돌아봤다. “사실 나는 이렇게 애교가 많고 그런 성격이 아니야.” “애교, 많잖아.” “수찬 씨한테만 그래. 나도 그게 신기해 죽겠어.” “정말이야?”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든 듯 수찬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 사랑이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아.” “!” 해수가 웃으면서 한 말이 수찬에겐 충격처럼 다가왔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천천히 몸을 돌린 그는 해수에게 입을 맞추었다. 뒤꿈치를 들어 올리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수찬의 팔에 안겨졌다. 이 사랑은 처음이라서……. 수찬의 가슴이 무섭도록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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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그래지더라

“세상에 없어도 되는 게 후회라고 생각했어. 말 그대로 후회니까. 그런데 네가 떠나고 난 뒤에 그 생각이 바뀌었어. 후회를 할 수 있는 건 행운이야.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만큼 후회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사랑은 해야지, 하지 말아야지, 다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고 마음먹어도 결국 사랑이 시키는 대로 될 뿐이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너무나 바쁜 그로 인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지오는 지치고 지쳐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난다. 그렇게 헤어졌다 생각했던 남자가 어느 날 그녀의 앞에 다시 찾아오고, 지오에게 잘못을 빌며 사랑을 고백한다. 절절한 그의 사랑 고백에 여전히 수한을 사랑하는 지오는 흔들리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다 내 잘못이야.” “괜한 얘기 안 해도 돼. 커피나 마시고 가.” “지오야!” “오빠하고 나하고 느끼는 감정이 서로 달랐던 것뿐이야.” “나는 아직 너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너밖에 없다고.” “나는 그런 사랑, 힘들더라.” 지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네가 보이더라.” “사는 게 그런 건가 봐. 뭐가 잘 안 맞아. 마음도 안 맞고, 타이밍도 안 맞고.” “나, 너 없이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수한은 피식 웃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지오가 말했다. “다시 시작할 마음 없어.” “끝이 안 났는데 무슨 시작을 해?” “임수한!” “몇 년씩이나 견뎌 줬잖아, 참아 줬잖아. 한 번만 믿어 줘. 다시는 너 외롭게 하지 않을게.” “내가 노력해서 참은 건지 알아? 사랑이라는 게…… 그래지더라. 참기 싫은데 참아지고, 견디기 싫은데 견뎌져. 그게 얼마나 힘에 겹고 답답한지 알아? 나는 싫어. 외로운 것도 싫고, 멀어지는 오빠를 보는 것도 싫어. 근데 내가 그걸 견디고 있네? 바빠, 바빠, 바빠, 입력된 로봇처럼 같은 말만 하는 오빠한테 전화를 걸 때마다 긴장이 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상처 받지 말아야지, 외로워하지 말아야지. 그게 사랑이니, 감정 노동이지.” 지오는 누구에게도 소리 내어 말해 본 적 없는, 메모조차 끼적여 본 적 없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 “끝났으니까 말할 수 있는 거야. 자존심 상해서 이런 말 하는 거 용납 못하겠더라. 나한테는 거지 같은 사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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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피고 지는 사이

“목련처럼 소리 없이 피고 지는 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어느새 피었다가 어느새 지더라고요.” “서글픈 꽃인 건가요?” “그리고 다시 어느새 피죠.” 스물일곱, 지독한 사랑의 상흔으로 또다시 누군가를 믿게 되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조차도 생기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랑한 만큼 그 상처는 너무나 컸기에. 그러나 오랜 시간 조용히 스며드는 가랑비처럼 잔잔하게 그녀의 마음을 두드리는 남자에게 언젠가부터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볼썽사납게 져버린 꽃잎조차 아름다울 것 같았다.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처럼 들려서. 봄이면 어지러이 바닥을 뒹구는 목련이 그저 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피는 것처럼 아프게 한 것들은 떠나가고 좋은 것들은 다시 되돌아온다는 그의 말에 비로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또다시 사랑이라는 파도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다시 핀다는 말, 듣기 좋았어요.” “좋은 것들은 돌아오죠. 우리를 아프게 한 것들은 떠나가고.” [본문 내용 중에서] “다음 주쯤이면 만개하겠어요.” 승하가 덜 핀 목련을 가리키며 말했다. “목련을 좋아하나 봐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꽃이라 그런가 봐요.” “저는 떨어진 꽃잎이 그렇게 싫더라고요.” “꽃뿐 아니라 모든 게 저물 땐 다 그렇죠. 그래도…….” 소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핀다는 말, 듣기 좋았어요.” “좋은 것들은 돌아오죠. 우리를 아프게 한 것들은 떠나가고.” 소연은 나란히 걷고 있는 그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승하의 손을 잡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멀미의 정체가 또렷해질 것 같았다. 쥐었다 폈다 하는 손바닥에 땀이 찼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걸음을 멈춘 그녀가 승하에게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해도 돼요?” “해요.” “손 한 번만 잡을게요.” “네?” 소연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손을 잡았다. 승하는 마냥 당황스러워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힘없이 자신의 손을 잡은 소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멋쩍은 듯 먼 곳을 바라보며 소연이 말했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어요.” “이런 느낌이네요.” 편안하기까지 한 그의 미소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소연은 사납게 일던 멀미가 잠잠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 우리를 아프게 한 것들은 떠나가고, 좋은 것들은 돌아오는 법이라잖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소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고 사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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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우연

“누…… 구시죠?”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요.” “이것 보세요.” “누군가를 처음 만나러 나왔던 것 같은데, 그 사람보다는 내가 나을 거예요.” 집안에서 돌연변이 개체로 불리는 막내 이모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나간 소개팅 자리. 특별히 설렐 것도, 가슴 뛸 일도 없는 만남이었기에 얼른 해치우자는 생각으로 나간 유은의 앞에 다가온 성재는 기대 이상의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첫눈에 그에게 호감을 느낀 그녀는 성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다가 그가 오늘 만나기로 한 소개팅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게 된다. 하지만 오랜만에 호감을 느끼게 된 그와 그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유은은 성재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누가 보면 일 년쯤 사귄 줄 알겠어.” “아주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 같아.” “내가?” “응.” “이제부터 알아 가면 되지, 뭐. 오랫동안.” 그녀는 문득 겁이 났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늘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오래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 이 사람과는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렇지만 헤어질 사람은 어떻게든 헤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깨닫는다기보다 받아들이게 된다. 대개의 이별이 그러했다. 성재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냥.” “오랫동안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그는 멋쩍게 웃는 유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하고 같은 시간을 살고 싶어, 오래오래.” 성재를 보는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그가 유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유은이 두 팔로 성재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래오래……. 아주 오랫동안……. 자신할 수 없는 말이라는 걸 안다. 확신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다른 남자와 소개팅을 하러 나갔던 카페에서 우연히 성재를 만나게 된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랑을 만나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과 어떤 이별을 하게 될지, 그 역시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러지 않기를, 헤어지는 일 없이 끝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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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을 만나면

“같은 회사에서 두 번씩 사내 연애를 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에요.” 3년 동안 사내 연애를 했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더 이상 남자도, 미래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연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던 그 남자가 그녀와 헤어지고 몇 달 만에 운명적인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믿고,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또다시 사내 연애를 할 생각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운명 같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널 만나고 꿈이라는 걸 꾸고 싶어졌어, 행복이라는 꿈을.” 사기 결혼, 말로만 듣던 그것의 피해자가 된 뒤 여자도, 사랑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사고라고 생각하려 해도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상처는 조금씩 그를 좀먹어 갔다. 인생에 더 이상 여자도, 사랑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앞에 나타난 예준은, 그로 하여금 믿음도, 사랑도, 행복도, 미래도 꿈꿀 수 있게 해준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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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남자

“맥주 한 잔 하시겠어요?” 삼십 년 지기와 약혼녀가 밀애를 즐긴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훈서는 더 이상 사랑에 대해, 사람에 대해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과 우정의 배신이 남긴 상흔은 그렇게 커서 어느덧 ‘관계’에 자격지심마저 생기고 말았다. 디자인 팩토리의 대표 훈서는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져 펜트하우스에서 직원들의 숙소가 몰려 있는 20층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왁자지껄한 20층에서 누구 한 명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송은선이라는 여자가 옆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는. 몇 번의 실연으로 사람에 대해 적당한 불신을 갖고 있다는 그녀는, 첫 만남부터 메마른 훈서의 가슴에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이야!’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배신과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거라는 것을. [본문 내용 중에서] “사람에 대한 적당한 불신감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적당히 이 사람 저 사람 옆을 기웃거리죠. 혹시 뭐가 있나 해서.” 고개를 숙인 훈서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버터에 구운 오징어를 먹기 좋게 자르던 혜미와 연주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인간적인 허술함이나 훈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훈서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곁에 앉은 은선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가 은선에게 물었다. “기웃거리는 이유도 설명해 줄 수 있어요?” “이유랄 것도 없어요, 간단해요.” “?” “할까 말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거죠.” “할까 말까, 라니요?” 뭘 튀기는지 지명이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어대는 프라이팬에서 기름 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덕분에 은선은 솔직하게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실연 안 당해 보셨죠?” “노코멘트 할게요.” “노코멘트의 다른 뜻이 예스라면서요?” 훈서는 능청스럽기까지 한 그녀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몇 번의 시답잖은 실연은 사람을 굉장히 모순적으로 만들잖아요. 사람이 그렇지 뭐,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괜찮은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리는 거 말이에요.” “모순이라는 게 현실적이라는 말일 수도 있겠네요.” “아주 근사치에 가깝죠. 사실 현실만큼 모호한 게 없잖아요.” 훈서는 적당히 사람을 불신하면서, 적당히 사람을 기웃거린다는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현실만큼 모호한 게 없다는 말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할까, 말까, 는 어떤 건가요?” “그건 조금 사적인 얘기이긴 해요. 주관적인 제 얘기요.” “주관적인 얘기?” “연애 얘기요. 할까와 말까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거든요.” 실없을 정도로 솔직한 그녀의 말에 훈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위트 있고 재미있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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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데이 원 나이트 (One day One night)

“사랑 따위 개나 줘 버려!”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와 누구보다 좋아하고 믿었던 선배가 함께 뒹구는 장면을 보게 되었을 때, 아니, 일부러 보란 듯이 그녀 앞에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냈을 때 아현의 세상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암흑 속에 갇힌 채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사람의 온기조차 잃고 살았던 그녀에게 그가 다가왔다, 자신과 너무나 똑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남자, 이준후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겁이 났었나 봐요.” 진심을 다해 사랑한 여자와 믿었던 선배의 결혼, 사랑 따위, 여자 따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이후 그 어떤 낯선 여자도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사랑에 무심한 척 굴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새처럼 작고 깃털처럼 가벼운 손아현이라는 낯선 여자를 안던 찰나, 그동안의 과장된 두려움과 공포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상처투성이 남녀가 서로에게 내미는 손길,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자, 구원이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맥주 마시자는 말, 내가 먼저 했는데…….” “키스는 내가 먼저 할게요.” 순간, 흠칫 놀란 아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준후가 훔치듯 아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현은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앉는 기척을 느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가 다물어진 분홍빛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아현이 그를 바라봤다. “이번엔 갈등 안 했어요.” 준후는 수줍게 웃는 그녀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무너지듯 가슴으로 안겨 드는 아현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작고 가벼웠다. 그는 나직한 숨결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기대듯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아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부리를 쪼아대는 두 마리 새처럼 서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입맞춤을 끝낸 사람은 준후였다. 아현의 아랫입술을 입술에 문 채 그가 혀끝을 내밀었다. 물컹한 혀로 아랫입술을 느른하게 핥아댔다. 그녀가 두 팔로 준후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다. 찰박대는 물처럼 가슴 밑동에 고여 있던 외로움이 해일이 일 듯 사납게 일어났다. 태연한 척 견뎌 온 것들, 가까스로 참아 온 것들이 맹렬한 몸짓으로 꿈틀거렸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친 채 준후가 더운 혀를 밀어 넣었다. 금욕(禁慾)으로 버텨 온 본능적인 외로움이 금기(禁忌)의 선을 넘나들며 격한 욕망의 불씨를 파닥였다. “으응…….”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키스엔 거침이 없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아현이 흐릿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준후가 물었다. “두려워요?” “오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아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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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내게 말을 거네

“나한테 기회를 줘.” “무슨 기회?” “정직한 남자가 될 수 있는 기회.” “장난하지 마.” “네 눈엔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 굽은 곳 없이 쭉쭉 뻗은 탁월한 신체 조건 덕에 어딜 가나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받아 왔던 유은오. 그런 그에게 자신을 소 닭 보듯 하는 혜준은 독특하고 신기한 존재였다. 아니, 신기함을 넘어 어떤 여자에게도 가져 본 적 없는 승부욕을 자극하는 여자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고 싶은 유일무이한 그녀는, 그의 관심을 달가워하기는커녕 지독히 냉소적이기만 하다. 온몸에 철벽을 두른 채 은오를 밀어내기만 하는 혜준. 그는 과연 ‘바람둥이’라는 오명을 벗고 그녀와 진실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본문 내용 중에서] “재미있어?” “재미있네, 장혜준하고 같이 비도 맞고.” 혜준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비가 사선으로 내리는지 푸른빛이 도는 셔츠가 실금이 가듯 젖어 들었다. 그녀는 빗살을 긋듯 젖어 드는 셔츠를 눈이 아프도록 노려봤다. “나는 댁처럼 다른 사람을 쉽게 보는 인간, 경멸해.” 계속 해보라는 듯 은오의 눈이 그녀를 바라봤다. “댁한테는 모든 게 쉽겠지. 세상 모든 여자가 댁을 좋아한다는 환상 속에서 사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나는 댁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들 중에 하나가 아니야.” “팔 아파, 얼른 말해.” 느물대던 표정을 흔적 없이 지운 그가 혜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조각상처럼 반듯한 그의 턱선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나한테 집적대지 마.” “나에 대해 얼마나 알아?” “알 필요도 없고, 알 가치도 없어.” “이런 모순이 있나. 다른 사람을 쉽게 보는 인간을 경멸한다면서 정작 장혜준 씨가 그러고 있네.” “내가 댁하고 말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그게 아니라는 거 알겠어. 나한테 할 말 있지?” “할 말 다 했어.” 이런 남자인 것이다. 다른 여자들처럼 호의적이지 않은 자신에게 놀리듯, 장난하듯 집적대는 남자일 뿐이다. 정작 단둘이 있는 곳에선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흔해 빠진 바람둥이일 뿐이다. 혜준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다른 곳을 보는 그를 노여운 눈으로 바라봤다. “더 할 얘기 없어?” “충고하는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해. 대화를 할 땐 상대방 눈을 쳐다보는 거야, 상대가 댁이 보기에 만만한 사람이라고 해도.” “에잇!” 욕설을 내뱉듯 거친 숨을 내쉰 그가 혜준의 손목을 잡았다. 차가운 빗줄기가 그녀의 뺨을 때려댔다. 은오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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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깊은 밤

“사랑이 그렇게 우스운가 봐요. 별것도 아닌 사랑인데 사람들은 왜 그걸 못해서 그렇게 안달하는 걸까요? 빌어먹을 사랑인데…….” “사람이 부족한 거지, 사랑이 부족하진 않아.” “아니요, 사랑이 못돼 먹은 거예요. 사람을 혹하게 만들잖아요.” 평생을 어머니만 사랑하고, 어머니만 바라보던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사랑을 찾았다며 결혼을 운운하자 서현은 그 짙은 배신감에, 사랑이라는 덧없는 감정에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어 독립을 결심한 서현은, 라일락 향기가 더없이 아름다워 계약한 빌라에서, 그녀와 같은 이유로 그곳에 살고 있는 회사 선배 건우와 자주 만남을 갖게 되고, 점점 더 그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마음에서 끊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 “어떤 거예요?” “미운 생각도 들지 않고, 원망하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아.”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고. 서현은 그의 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시원하게 막걸리를 마신 건우가 말했다. “나는 절망으로 죽어 가고 있는데, 원망할 대상이 없다는 게 막막했어. 남아 있는 감정이 있어야 원망을 하든 저주를 하든 할 텐데 말이야. 너 때문이라는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어.” “그 정도로 끔찍했을 테니까요.” “그 무렵에 할머니가 계신 납골당을 찾아간 적이 있어. 그런 생각이 들더군, 죽은 사람도 이렇게 그리운데, 산 사람이 그토록 깨끗이 지워질 수도 있구나 하는.” “지금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 맞죠?”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얘기해 주고 싶었어.” “무슨 얘긴데요?” “아버님이 느끼셨을 절망과 막막함에 대해.” “선배, 그건…….” “나는 모르지. 모르기는 이서현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내를 잃은 아버님의 마음이 어땠을지.” “막막하고 무섭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사랑을 배신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아까 네가 여자 친구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아?” “?” “물론 내 치부를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밀려들었어. 어라, 얘는 누군데 내 편이 돼 주는 걸까? 그런 감정 말이야. 네가 내 수치심을 덮어 주는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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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뒤에 오는 건

“다시 시작하자. 한순간도 널 잊은 적 없어.” “거짓말.” “잊으려고 기를 썼어. 안 되더라. 잊는 것도 안 되고, 벗어나는 것도 안 되고.” “난, 다 잊었어.” “기회라는 거, 나한테 한 번만 줘.” 발화점이라고 말할 만한 계기 같은 건 없었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가 남자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사 동기로 만나 전우애와 형제애로 똘똘 뭉친 관계 때문인지, 어느 날 갑자기 ‘사귀자’라는 낯간지러운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서로가 같은 마음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믿음은 진욱의 생일날,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그의 ‘여자 친구’라는 여자로 인해 산산이 무너지고, 가영은 두 사람이 그저 ‘썸’을 타던,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음을 처절히 깨닫게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던 관계인데, 그녀의 세상은 철저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래서 떠났다, 그의 곁을. 그리고 5년 후, 가영은 우연히 기차 안에서 그와 재회하게 되는데……. “사랑 뒤에 오는 그 느낌이 싫었어.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그런 경험, 두 번은 안 하고 싶었어. 그런데 아니었어. 사랑 뒤에 오는 건 상실이 아니었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지.” [본문 내용 중에서] “미안했어.”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는 진욱을 올려다봤다. “지난 일이잖아.” “오래됐지.” 독백 같은 그의 말투에서 자조적인 체념이 느껴졌다. “왜 그땐 말 안 했어?” “무슨 말?” “미안하다는 말. 기다렸었는데…….”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든 진욱이 후드를 눌러썼다. 휘날리듯 퍼붓는 눈발이 그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 “상황을 그렇게 만든 내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어.” “양다리라도 걸쳤던 사람처럼 말하네.” 가영이 머쓱한 표정을 감춘 채 애써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진욱 씨하고 내가 그런 사이였다는 얘긴 아니지만 말이야.” “내 실수는 한 가지야.” “실수라니?” “어머니한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 일.” 가영은 시린 삭풍이 휘몰아치는 소리를 들었다. 습습할 정도로 시린 바람이 텅 빈 가슴에 메아리를 울려댔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가영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듯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땐 그게 자존심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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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적 폭염

“오늘 일은 다 잊는 거다?” “너야말로 다른 소리 하지 마.” “상우야, 우리가 못할 짓을 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확실해?” “나는 그래.” 상우는 내게 동성 친구만큼, 아니, 그 이상 가까운 ‘남자사람친구’였다. 친구들은 그런 나와 그를 ‘의남매’가 아닌 ‘의형제’라고 부르곤 했다. 그만큼 우리 둘의 관계는 심플했다. 그런 그와 설마 원 나잇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절대로 오래된 친구, 그것도 못할 말이 없을 만큼 가까운 친구와 연애 따위의 감정으로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음에도. 단 하룻밤뿐이라고 다짐을 했음에도 그 밤, 그에게 받았던 사랑의 고백이, 열정적으로 서로를 갈구하던 순간이, 따스한 품과 은은한 눈빛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기습적인 폭염처럼 다가온 사랑 앞에 나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본문 내용 중에서] “그날 말이야, 지질하게 굴어서 미안해.” “괜찮아, 멋쩍어서 그런 거잖아.” “박상우, 너는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거니?”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상우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의 의연한 표정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편하고 만만한 친구인 줄 알았던 그가 내 모든 것을 내려놔도 될 것 같은 커다란 나무처럼 느껴졌다.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일찍 고백하지.” “그러게 말이야, 진즉 고백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망설였어? 거절당할까 봐?” “거절은 괜찮은데, 괜한 고백 때문에 너하고 서먹서먹해질까 봐 그게 걱정됐어.” “너야말로 생각이 많았네?” “그렇지. 맥주 더 시킬까?” 비어져 가는 내 잔을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나는 상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안 취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 “말짱한 정신으로 말하고 있는 거라고.” “무슨 소릴…….” “나가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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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이게 뭐예요?” “내추럴.” “제자리표 아니에요?” “제자리표의 이름이 내추럴이에요.” “아! 원래 이름이 따로 있었구나. 나는 제자리표가 이름인 줄 알았어요.” “은성 씨를 보면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자리를 말하는 거죠?” 사랑하는 남자와 믿었던 친구에게 동시에 배신을 당하면서 더 이상 누군가와 관계라는 걸 갖지 못하게 된 여자, 한은성. 사랑하는 여자에게 기만을 당하며 더 이상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남자, 권진언.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믿을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하고,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 앞에서 한때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릴 용기를 갖게 된다. [본문 내용 중에서] “배신이라는 게 완성되려면 믿었던 사람이 있어야 해요.” 은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진언이 하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아서였다. “듣고 보니까 정말 그러네요. 믿었던 사람이 있어야만 배신이 완성되는 거네요.” “모르는 사람한테 배신당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진언은 물 잔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끝을 봤다. 말을 할까, 하지 말까, 머뭇거리는 은성의 갈등이 느껴졌다. 그는 조금 전에 은성이 그랬던 것처럼 시계를 봤다. 훈구와 혜성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은성에게 자신이 느꼈던 감정에 대해 말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살아진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됐어요.” “맞아요, 어느 순간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살아는지네, 하면서요.” “사람이 항상 앞을 향해 걷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비틀거릴 때도 있고, 주저앉을 때도 있는 거죠.” 진언은 처음으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봤다. 낯선 사람에게는 보여 주지 않을 것 같은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내가 왜 웃는지 궁금하죠? 권진언 씨 말처럼 비틀거리면서 걷고 있는데 내 등을 두드려 주던 사람들 생각이 나서 웃었어요. 힘내, 괜찮아질 거야, 그러더라고요. 주저앉기 직전인 나한테.” “사람이 사람한테 줄 수 있는 위로에는 한계가 있어요. 격려 또한 마찬가지죠. 어떤 길은 혼자서 지나야만 하기도 해요. 그런 길을 걸을 땐 남들이 나를 위로하거나 격려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위로도 격려도 받지 못하는 거예요.” 은성은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혼자서 지나야만 하는 어떤 길……. 비틀거리면서, 주저앉으면서 홀로 그 길을 걸어야만 했던 날들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문득 묻고 싶어졌다, 어떤 위로도 격려도 받지 못하는 그 길을 홀로 걸었다고 말하고 있는 진언에게. “그 길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해요?” 그는 고민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 길 끝에 낯설게 느껴지는 내가 서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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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눈

“잠깐 나하고 데이트하는 건 어때?” “실장님, 내가 실장님하고 데이트를 왜 해?” “가끔은 도피처가 필요하기도 하잖아.” “그래서 실장님이 내 도피처가 돼 주겠다고?” “못할 이유 없지.” 사귀던 여자와 남자가 헤어지는 건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별은 사랑만큼이나 흔하다. 하지만, 헤어진 전 남친이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의 직장 동료와 사귀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회사에서 유일하게 속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인 동료와. 바로 그 거지같은 꼴을 당한 여은은, 자신을 보며 수군대는 동료들의 수군거림에,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동료들의 눈빛에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을 참을 수가 없다. 그런 여은에게 그녀의 상사이자 대학 선배인 재하가 말한다, 자신을 ‘이용’하라고. 기꺼이 그녀의 도피처가 되어 주겠다고. 그녀가 다니는 동보 그룹의 후계자, 신재하. 4월의 눈처럼 신기루 같은 재하의 제안에 한때 그를 가슴 아프도록 짝사랑했던 그녀는 너무도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동시에 온몸이 떨릴 만큼 설레기 시작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틈새 공략하는 거, 엄청 비열한 짓이라는 거 알지? 가장 약한 상황, 가장 만만한 타이밍. 그건 진짜 나쁜 짓이야.” “틈새 공략? 표현 한 번 기가 막히는군.”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실장님이 난데없이 이상한 얘길 하니까 그렇지.” “나도 난데없었어.” “?” “언제쯤 고백할까, 어떻게 얘기할까 고심하고 있는데, 네가 남자 친구 생겼다고 해서 당황했어.”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여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틈새 공략이나 할 사람으로 보여?” “실장님이 내 입장이 돼 봐, 뜬금없고 난데없지. 고백을 하려면 진즉 하든지.” “입사하자마자 표정 바꾼 건 너야.” “그야 회사니까 당연한 거지.” “지나쳐.” 실수로라도 한 번쯤 오빠 소리를 할 법했다. 하지만 여은은 그러지 않았다. 실장님, 소리를 얼마나 야무지게 하는지, 얼마나 깍듯하게 구는지 얄미울 정도였다. “하나도 안 지나쳐.” “네가 하도 선을 분명하게 그어서 대뜸 사귀자고 하면 달아날까 봐 고심했었어.” “…….” “사실은 거절당할까 봐 겁도 났었어. 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리로는 생각했어. 이젠 얘기할 수 있겠구나. 막상 그러려니까 기회주의자가 된 것 같아서 말하기가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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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One night (원 데이 원 나이트)

“사랑 따위 개나 줘 버려!”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와 누구보다 좋아하고 믿었던 선배가 함께 뒹구는 장면을 보게 되었을 때, 아니, 일부러 보란 듯이 그녀 앞에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냈을 때 아현의 세상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암흑 속에 갇힌 채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사람의 온기조차 잃고 살았던 그녀에게 그가 다가왔다, 자신과 너무나 똑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남자, 이준후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겁이 났었나 봐요.” 진심을 다해 사랑한 여자와 믿었던 선배의 결혼, 사랑 따위, 여자 따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이후 그 어떤 낯선 여자도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사랑에 무심한 척 굴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새처럼 작고 깃털처럼 가벼운 손아현이라는 낯선 여자를 안던 찰나, 그동안의 과장된 두려움과 공포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상처투성이 남녀가 서로에게 내미는 손길,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자,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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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그 사랑

“그 사람이라는 말…… 안 듣고 싶어.” “선배, 그건…….” “네가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해.”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수영과 혁준은 둘도 없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누구라도 두 사람이 사귄다고 생각할 만큼. 그러나 두 사람은 항상 입버릇처럼 ‘연애’는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 5년, 두 사람은 숱한 나날을 함께 보내왔다. 수영도, 혁준도 서로에 대한 감정을 부인하거나 감추지는 않았다. 사귀자느니, 사랑하느니 하는 직접적인 말을 주고받지 않았을 뿐 자신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언제까지 미적거리며 이런 관계를 고집하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사랑을 고백하기에 적절한 시간을 놓쳤던 것뿐. 연애 아닌 연애를 즐기고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견고했고, 서로를 향한 사랑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수영의 전 남자 친구가 같은 회사에 입사하면서 둘의 사이는 틀어지기 시작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당황하게 했다면 미안해.” “내가 왜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야…….” “그 자리에 박기석이 있어서?” “…….” “그렇다고 대답하려니까 자존심 상하고, 아니라고 대답하려니까 뭔가 찜찜하지?” 혁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수영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박기석이 수영을 쳐다보며 웃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났을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하다는 말, 안 하고 싶어.” “왜 박기석 때문에 그런 짓을 해?” “무슨 말이야?” “한 번이라도 나 때문에 그랬던 적 있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의아한 눈으로 수영을 바라봤다. 수영은 착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혁준은 결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긴 시간을 알고 지내는 동안 그가 오늘처럼 행동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답답할 정도로 꾹꾹 참던 사람이잖아. 그런 선배가 고작 박기석이란 인간 때문에 자제력을 잃었다는 게 화가 나서 그래. 대체 그 사람이 뭔데? 그 사람이 뭐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야?” “뭐?” 수영은 당황했다. 난데없는 그의 말 때문이 아니라 서글프게 들리는 혁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착잡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혁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라는 말…… 안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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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나 사랑해?” “그런 건 말로 하는 거 아니야.” “말로 안 하면 뭘로 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얘기해 봐.” “아는 얘기를 뭘 말로 하고 그래.”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소진은 남편이 될 준성에게 모멸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소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양가의 뜻대로 결혼식은 거행되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이보다 더 완벽한 결혼 생활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언제나 듬직하고 성실한 남편 준성은, 비록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행동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러던 어느 날, 비로소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인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고백이라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오빠는 어쩔 수가 없네. 질의응답 식으로 대화를 하는 수밖에. 대답해, 이번에도 입 다물고 있으면 내가 나갈 거야.” “가긴 어딜 가.” “즉각적으로 대답할 줄 아네. 묻는 말에 대답해. 나하고 이혼하고 싶어?” “아니.” “나하고 헤어져서 잘 살 자신 있어?” “아니라고 대답했잖아.” “내가 오빠한테 가족이야, 남이야?” “우리가 어떻게 남이야.”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랬다는 거네? 나는 오늘 자존심이 저기 바닥에 떨어져서 모래 가루가 됐어. 그런데도 이러고 떠들고 있어. 왜인지 알아? 나는 오빠하고 헤어질 생각, 눈곱만큼도 안 하거든. 우리가 왜 헤어져? 아니, 어떻게 헤어져? 생각만 해도 이렇게 화가 나고 속상한데…….”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는 소진의 코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준성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게 다야?” “미안해.” “왜 자기 속에 있는 말을 안 해? 한마디라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준성이 당황한 얼굴로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울러 간다, 왜! 속상하게 왜 그러고 살아! 세상에 아무도 없는 사람처럼 왜 그러냐고! 내가 오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기나 해! 얼마나 미안했는지…….” 준성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소진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든 준성의 눈시울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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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우리는

“나하고 잘래?” 더 잘못될 건 없었다. 큰딸과 같은 나이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아버지. 버젓이 결혼식까지 올리고 사는 그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한 달에도 여러 번 히스테릭한 발작을 일으키는 어머니. 졸지에 가문의 수치 덩어리로 전락한 채 남편은 물론 시댁 어른들의 겁박에 시달리는 언니. 한마디 상의조차 없이 뉴욕 지사로 달아나 버린 남동생. 온라인 요금 고지서처럼 메신저 문자로 날아온 일방적인 파혼 통보까지.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던 회사마저 그만두게 된 본희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절망에 지쳐 버리고 말았다. 하나같이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할 뿐, 벼랑 끝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떠밀리는 자신의 처지를 염려해 주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단 한 사람, 강훈을 제외하고는. 그래서 말했다, 그에게. 하룻밤 따스한 온기와 위로가 절실했기에.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그와의 하룻밤 일탈. 그 여름 그 날,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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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 내일을 생각해 봤어

“네가 없는 내일을 생각해 봤어.” “네가 없는 내일 같은 건 없어. 그런 내일은 살고 싶지 않아.” 태엽을 감은 인형처럼 독한 말을 해대는 그녀에게 금방 돌아오라고 말한 건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돌아서야 했는지를. 감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떠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사랑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그 끝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 일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사랑이 더욱 견고해질 뿐. 네가 없는 내일…….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알고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같은 시간을 호흡한다는 것을 알기에, 떠난 시간조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닌 너를 생각하면서. [본문 내용 중에서] “어떻게 지냈어?” “그럭저럭.” “왜 안 물어봐?” “뭘?” “어떻게 지냈는지.” 그녀는 나직한 정욱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머그잔을 집어 들며 그가 말했다. “커피 마시고 미용실부터 가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지 그랬어.” “말 같은 소리를 해.” 은수의 말에 그가 정색을 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의 말이 맞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열네 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있던 내내 끈을 단단히 묶은 운동화를 눈이 아플 정도로 내려다봤다. 잘 다녀오라는 정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선택한 건 이별이 아니라 도피라는 걸. 로건 국제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정욱의 얼굴이,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그리웠다. 은수는 나침반의 뾰족한 바늘이 제 심장을 흔들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권정욱. 가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 끝을 떨어대는 나침반의 바늘은 삶의 유일한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했다. 그는 서운할 정도로 싱거운 은수의 말을 듣고 나서야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를 꺼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그러게.” “길어야 두 달이겠지, 그렇게 생각했어.” 정욱은 커다란 눈을 감았다 뜨는 그녀를 바라봤다. “왜 안 잡았어?” “안쓰럽기도 하고 안돼 보이기도 해서.” “내가?” “사실은 독한 척하는 네 모습이 어설퍼서 마음이 아팠어.” “…….” “헤어질 것 같았으면 그런 식으로 달아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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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오는 봄 같아서

“나한테도 굉장히 긴 겨울이 있었어요. 꽃이 피는데도 내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라서.”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리 느리게 와도 봄은 온다는 것.” “그런 거죠? 느리게 와도 봄은 오는 거죠?” 인생에서 처음으로 절망을 경험하게 된 그 밤, 지훈은 한줄기 빛이 되어 준 여자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회사 로비에서. 유다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녀보다 현재의 그녀에게 더 큰 호감과 호기심을 느끼게 된 지훈은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서고, 거지같은 이별의 기억으로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믿음을 잃어버린 채 혹독한 겨울 속에서 살고 있던 그녀는 눈물겹도록 완벽한 지훈의 사랑 덕분에 비로소 봄을 맞이하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겨울이 길게 느껴진 적 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해에 그랬던 것 같아.”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가 지훈을 돌아봤다. “거실 창 쪽에 할머니 의자가 있었어. 거기 앉아서 늘 밖을 내다보셨지. Y시에는 잠깐 내려가셨던 거야. 둘째 고모가 그곳에 계시는데 며칠 얼굴을 보고 오겠다고 가셨지.” 할머니는 두 다리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자식들이 사는 곳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셨다. 둘째 고모가 사는 Y시에도 그렇게 내려가셨다. 할머니의 병환이 차츰 깊어 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가족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아침에 주저앉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세끼 식사를 하시던 할머니가 쓰러진 그날, Y시에 있는 대학 병원의 의사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내렸다. 사나흘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여든이 넘은 고령인데다 고열에 시달리는 할머니를 서울까지 모시고 오는 일은 불가능했다. 응급 헬기를 불사하려던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은 40년이 넘는 할머니의 주치의에 반대에 부딪혔다. 부득불 서울로 모셔 오는 일이 오히려 할머니의 남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 모두가 Y시로 내려갔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유난히도 더웠던 그 여름……. 하지만 지훈이 기억하는 그 여름은 온통 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손으로 하얗고 고운 눈을 만들어내던 누군가로 인해. “그해 겨울엔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의 빈 의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어. 아마 그때쯤 할머니의 죽음이 실감이 났던 것 같아. 부재라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잖아. 나중에는 고통스럽더라고. 이 겨울이 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나한테도 굉장히 긴 겨울이 있었어요. 꽃이 피는데도 내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라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별것 아닌 이별이었다. 어쩌면 하찮기까지 한 이별이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 이별 때문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버거워지고 무서워졌다.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고 멀어지는 사람의 등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에 흉터를 남긴 홍상을 원망했다. 지훈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다혜가 말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되게 거지같은 이별을 했어요.”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거지같은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게 힘들어지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실장님도 그런 이별 해 본 적 있어요?” “이별은 아니어도 인간관계에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있어. 사람이 무서워지더군.”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이 사람도 나중에 그렇게 변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불신이…… 후우.” 다혜는 자신이 6년씩이나 그런 생각 속에서 헤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지훈이 말했다. “세상에 거지같은 이별만 있진 않아. 어느 날 할머니가 앉아 계시던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보는데 봄꽃이 한창인 거야. 그때 깨달았지, 느리게 와도 봄은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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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랑은

“내가 너한테 미안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바빠서 미안한 것 말곤 없어요?” “없어. 내가 아는 사랑은 너밖엔 없어.” 끔찍한 실연을 당한 선배에게 연민 따위 가져 본 적도 없고, 오래전부터 그를 사랑해 온 적도 없다. 만남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선배 중 하나에 불과하던 태욱이 차츰 한 남자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나직한 밀어를 속삭이는 스위트한 남자는 아니었다. 좋고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데 있어 우유부단하진 않았지만 결코 다정하진 않았다. 너무나 힘든 시간을 견딘 그이기에, 아프다, 힘들다 투정 따위 할 수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서로 사랑하고 있기에 남들의 시선 따위 상관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 바빠진 그로 인해 수정은 외로워졌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저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는 것을. 많이 외로웠다는 것을. “어떤 시간이 됐든 같이 하자.” 그런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의 그 말은, 알게 모르게 고여 있는 모든 외로움을 불식시킬 만큼 완전한 고백이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솔직하게 말해 봐요.” “뭘?” “내가 어떤 여자였으면 해요?” “나밖에 모르는 여자.” 즉각적인 그의 대답에 당황한 수정이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태욱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어려운 일이야?” 수정이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도 물어봐요, 선배가 어떤 남자였으면 하는지.” “난 이미 그러고 있어.” “하!” “말했잖아, 내가 아는 사랑은 정수정 너밖엔 없다고.”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말. 수정은 제 앞을 스쳐 지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어렵지 않아. 잠시 숨을 돌리려고 하면 네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라.” “정말?” 태욱은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요즘 네가 보기 좋아.” “괜찮은 척 안 해서?” “응.” 고개를 숙인 수정은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태욱이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스러질 것처럼 누웠다 다시 일어서는 불빛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수정이 물었다. “날, 사랑해요?”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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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늘이 별로 가득해서

“넌 캄캄한 나를 비추는 별 같아.” “오빠가 하늘 하면 되겠네, 내가 별 하고. 캄캄한 곳이 있어야 내가 좀 빛나거든.” 알고 있다, 두 사람의 결혼이 다른 사람 눈에는 ‘정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그러나 은별에게 결혼은 인생에 있어 유일한 탈출구이자 비상구였고, 1년이라는 시간이 넘게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옆에 있는 이 남자, 최도헌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감정 표현에 서툴고, 말수 없이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그녀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늘 혼자였던 자신에게 ‘우리’라는 말을 들려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아내는 칠흑 같은 자신의 삶에 빛이 되어 준 여자였다. 막막한 하늘을 밝히는 작은 별 같은 여자였다. 비록 표현이 서툴러 말 한마디 못 꺼내지만, 어느 순간 이 행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잠깐 꾸다가 깨어난 꿈처럼. 다른 듯 서로 닮은 상처를 가진 도헌과 은별. 사랑에 대한 바람이, 행복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간절할 수밖에 없는 두 남녀의 밤하늘 별 같은 사랑 이야기. [본문 내용 중에서] “솔직히 말해 봐요. 지금 외로워요?” 고개를 돌린 도헌이 뚫어질 듯 그녀를 바라봤다. 긴 침묵 끝에 그가 대답했다. “아니.” “다행이다.” 도헌은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위로가 마치 자신의 등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너는?” “뭐가요?” “외로워?”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내 인생은 오빠를 만나기 전과 만난 뒤로 나뉘어요. 난 절대적으로 행복해요. 가끔씩 오빠한테 투정을 부리는 건 내가 행복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더 완전해지고 싶고, 더 완벽해지고 싶은 욕심이랄까. 아무튼 난 오빠가 나하고 결혼해 준 게 너무너무 고마워요. 안 한다고 했으면 어떡할 뻔했어.” “나도 그래.” “뭐가요?” “결혼해 줘서 고마워.” 은별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그가 하는 말이 거짓말 같기도 했다. 아니면 잘못 들은 말이든지. “다시 말해 볼래요?” 다시 차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도헌이 말했다. “네가 없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언…… 제부터 그랬어요?” “모르겠어.” “나, 좋아해요?” “어.” “나는 오빠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 너는 내가 가진 전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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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59분

“그만 돌아와. 벌써 2년이야.” “그럴 생각 없어. 헤어진 사람은 헤어진 채로 사는 거야. 그러려고 헤어지는 거고.” “하루도 너하고 헤어진 적 없어.” 사랑했다. 시어머니의 심한 멸시와 조롱에 수없이 상처를 입으면서도 사랑하는 남편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으며 그 모진 시간을 견뎌냈다. 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편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그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지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은오의 세상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그에게 상처 받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기적처럼 찾아온 선물. 외로운 그녀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주었던 그 빛이 완전히 소멸했을 때, 은오는 지훈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새어머니의 농간으로 아내를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지훈은 은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했지만, 한 번 무너진 둑은 다시 세울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이대로 영영 먼 곳으로 가버릴까 봐 두려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혼했지만,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생각한 적 없다. 6시 59분, 이제 그만 바라보기만 했던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 대신 서로 마주 보고 끌어안아야 할 시간이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새어머니는 어머니에겐 상간녀였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은오가 쥐고 있던 포크가 접시 밖으로 밀려났다. 지훈이 재빨리 손잡이를 잡은 포크를 접시에 올려놨다. 당황한 은오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그런 얘기 없었잖아.” “내겐 수치스러운 기억이야. 자세히 얘기하기가 그랬어.” “…….”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싫어해. 미워하기도 하고.” “나한테는 말했었어야지.” “…….” “그럼 나도 얘기할 수 있었을 거야. 정말 힘들다고……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지른 분이라는 걸 입에 올리는 게 쉽지 않았어.”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마치 오해를 떠받치고 있던 커다란 돌 하나가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허공에 들려 있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 감정이 어지럼증을 만들어냈다. 지훈이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네가 이해해 주길 바랐던 것 같아. 이기적이었던 거지.” “나라도 얘기하지 못했을 것 같긴 해.” 고개를 든 그가 은오의 얼굴을 봤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해. 어머님이 하는 얘기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나한테 했던 말들도 그렇고. 그냥 알아주길 바랐던 것 같아. 내가 겪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빠가 이상했어.” 왜 저러는 걸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그런 마음이 시린 바람을 먹고 자라는 고드름처럼 커져 갔다. “우리가 살던 집만 놔두고 다 정리했어. 집은 네가 돌아온 뒤에 상의해서 정리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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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우리는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혁 씨 기억이 더 선명해졌어. 그게 참 신기했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래.” “그런 걸까?” “내가 해 봐서 알아. 처음엔 희미해. 잘 지내겠지, 건강하겠지, 별일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네 현재가 궁금해졌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오늘은 뭘 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보고 싶어지더라.” 결혼을 앞두고 약혼자에게 일방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당하며 스스로에 대한 신뢰마저 잃어 가던 시기, 갈 곳을 잃어 방황하는 은성에게 우혁은 유일하게 마음을 감싸 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와 함께 갔던 칠흑 같던 그 밤바다는, 절망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희망을 주던 곳이었다. 모든 것이 정리가 된 후, 그곳에 가면 꼭 그를 볼 것 같은 마음에 또다시 바닷가를 찾아간 그녀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우혁과 마침내 재회하게 되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어디까지 생각해 봤어?” “뭘?” “우리 관계.” “어디까지 생각하면 되는데?” 그는 미소 지으며 되묻는 은성을 바라봤다. “그날,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는 널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무슨 생각?” “널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 오래오래.” “그런 우혁 씨 생각 때문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었을 거야.”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 “말해 줘.” “조금도 절망스럽지 않았어. 정말 조금도.” 은성이 고마웠다는 짧은 메모를 남기고 떠난 버린 그날, 우혁은 조금도 절망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휴대폰을 없애 버렸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그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정말이야?” “네가 돌아올 거란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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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랑입니다

“아프지 마.” “응?” “혼자 있을 때 아프지 말라고.” “…….” “아프면 바로 전화해.” “……너, 좋아해도 돼?” 세상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힘들 때마다 의지가 되어 주는 경훈과 연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한때 큰 상실과 아픔에 허덕이며 차마 연락을 못했던 적도 있지만, 서로가 있었기에 커다란 슬픔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었다. 좋은 것이 있으면 저절로 상대를 생각하고, 말하기 어려운 고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친구 사이에 하기에는 과한 선물들을 서로에게 해주면서도 언제까지나 ‘친구’라고 말하는 두 사람에게, 가족들이, 친구들이 말한다, 지금 너희 둘이 하는 바로 그게 사랑이라고. [본문 내용 중에서] “아, 하루가 정말 길었네.”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기지개를 켠 연주는 슬며시 경훈의 손을 잡았다. 연주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딴청을 하며 창밖을 보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경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연주야, 이게 뭐야?” “뭐가…….” 덮치듯 닿은 그의 입술이 연주의 숨소리를 빼앗았다. 연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리 운전기사가 자신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연주의 기우였다. 지독하게 짧은 입맞춤이었다. 경훈은 여전히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가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첫 키스는 아쉽게 하는 거야.” 고개를 돌린 연주가 그 못지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 누가 그래?” “내가.” 경훈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돌린 채 멋쩍게 웃고 있는 연주를 바라보면서. 연주는 눈을 깜박한 사이에 청파동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경훈의 손을 잡고 있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 것뿐인데 어느새 집 앞이었다. “내리지 마, 들어갈게.” “내리면 안 돼?” “어?” 뒷좌석의 문을 열려던 연주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대답했다. “뭐 해, 안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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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랑이 우연히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 하루에 세 번씩만 중얼거려요.” “…….” “할 수 있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 “같이 행복해져요, 우리.” 고아라는 이유로 남자 친구의 어머니에게 갖은 수모와 상처를 받아야 했던 미소는 우연히 찾아간 바닷가 마을에서 윤호를 보게 된다, 자신만큼이나 쓸쓸한 뒷모습으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서 있던 윤호와 우연한 기회에 통성명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은 바닷가가 아닌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와 신기할 정도로 겹치는 수많은 우연 속에서, 또다시 상처 받을까 두려웠던 그녀의 마음속에 어느새 자그마한 희망이 움트기 시작한다. 감히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던 그 희망을 용기 내어 말해 본다, 이제 행복해지고 싶다고.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사랑이, 이제 그만 행복해져도 된다고 축복해 준다. [본문 내용 중에서] “회사는 어떻게 됐어요?” “선배님들 덕분에 지금까지 다니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내가 예전으로 돌아가질 못해요. 내가 그분한테 당하는 걸 회사 사람들이 많이 봤어요. 그래서인지 자격지심을 버릴 수가 없게 됐어요.” 미소는 씁쓸하게 웃었지만 윤호는 웃는 시늉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고 말했잖아요.” “그랬었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모르겠어요.” “죽을힘을 다해서 싸워 봐요.” “뭐하고 싸우면 될까요?” “조금 전에 본인 입으로 얘기했잖아요, 자격지심을 버릴 수가 없다고.” “!” “그런 건 다른 사람이 버려 줄 수 없어요.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어도, 결국엔 내가 버려야 하는 것들이에요.” 윤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미소는 취기가 오르는 뺨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냈다. 누구에게라도 꼭 한 번은 듣고 싶었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는 말……. 고아이기 때문에 겪는 일이 아니라는 말…….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라는 그 말……. 그랬던 그 말을 같은 날, 같은 바닷가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억하는 사람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미소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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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사랑은

“지금 우리의 사랑이 가장 좋은 것 같지 않아?” “오빠를 다시 만나고 난 뒤로는 늘 그랬어. 덤덤하던 때도 좋았고, 뜨거워진 때도 좋았고.” 9년째 연애 중인 승건과 자운. 함께해 온 시간이 오래된 만큼 설렘은 무뎌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무던하다고 해서 서로를 덜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승건의 상사로 부임해 온 현영의 일방적인 관심과 유혹은 잠잠하던 두 사람 사이를 변화시키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설렘은 승건과 자운의 가슴을 다시 세차게 뛰게 만드는데……. [본문 내용 중에서] “의심받을 짓, 안 했어.” 자운이 피식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미더운 상황이니?” “…….” “긴말하고 싶지도 않아, 생각할 시간을…….” “생각할 시간, 그런 걸 왜 가져?” “뭐?” “그냥 내 앞에서 화를 내.” “싫어.” “시간 갖고 그러는 거 하지 말자. 나한테는 트라우마야.” 그녀와 헤어졌던 시간을 떠올린 승건이 몸서리를 쳤다. 자운은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적인 얘기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친분이 없어서.” “그래서 친해질 때까지 기다렸니?” 승건의 얼굴에는 억울한 표정이 가득했다. 자운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화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승건이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올까 봐 겁이 났다. 상사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그런 것뿐인데 그걸 이해 못하는 네가 이기적이라고 할까 봐.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사람한테 할 말이 없잖아. 어느 정도 안면이 생겨야 곤란하다고 말을 하든지, 그만하라고 말을 할 수가 있지.” 그의 목소리에도 억울함이 묻어났다. “저녁마다 같이 있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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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사랑

“호혁 씨한테도 지금이 오후인 것 맞지?” “내가 기다린 오후, 맞아.” “기다렸어?” “내색은 못했지만 기다렸지. 아진 씨는 안 그랬어?” “그걸 안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호혁 씨 말처럼 내색하지 못한 것뿐이지.” 7년 전, 아진은 결혼한 지 여덟 달 만에 이혼을 했다. 살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기 위해 한 이혼이었다.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사람들은 걱정하듯, 염려하듯 툭툭 내뱉는다, 이제 그만 잊고, 마땅한 사람 만나 새 출발 하라고. 마땅한 사람……. 과연 그녀에게 마땅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에게 짙은 모멸감을 느낀 아진은 그녀와 ‘같은 처지’라는 이모의 말에 욱하듯 선 자리를 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홧김에 나간 선 자리에서 그녀는 마치 또 다른 자아를 만난 것처럼, 숨소리마저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호혁을 통해 산산이 부서진 사람에 대한 기대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꾸게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오후를 비로소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늦은 시간이 되면 그림자가 길어지는 거, 알아?”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게 신기했었어.” “아진 씨도 아는구나.” “학원 끝나고 집에 가다 보면 내 그림자가 엄청나게 긴 거야. 지금도 그러네.” “오후에 보는 내 그림자가 좋았어.” “키다리 아저씨 같았겠네?” “그땐 그 그림자를 보면 내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오후에 보는 그림자……. 아진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호혁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을 만큼 공감하고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아진이 물었다. “호혁 씨한테도 지금이 오후인 것 맞지?” “내가 기다린 오후, 맞아.” “기다렸어?” “내색은 못했지만 기다렸지. 아진 씨는 안 그랬어?” “그걸 안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호혁 씨 말처럼 내색하지 못한 것뿐이지.”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잃었지만 더러는 그 내일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길 바라곤 했다. 이제는 그만 행복해지고 싶어서. 손을 잡고 있던 아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호혁이 말했다. “아진 씨를 보면 어린 시절 오후에 봤던 내 그림자 같아.” “뿌듯하다는 얘기지?”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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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시간

“나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중이라고 생각해.” “박이서!” “헤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시간도 있었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 솔직히 모르겠어.” “이서야,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우리가 왜 헤어져?” “사랑은 서로 지치면 끝나는 거야. 지긋지긋해지는 순간 끝나는 게 사랑이야.” 6년 동안 찬영과 비밀 연애를 하고 있던 이서는 회사 내에서는 공식적으로 ‘솔로’였다. 2년 전 남자 친구인 찬형이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마주 볼 시간도, 따듯한 말 한 마디 나눌 시간도 없이 바쁜 그에게 그저 투정하기 바빴던 처음이 지나가고,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화조차 내지 않기 시작하면서 이서는 실감하게 되었다, 둘이 이별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막상 이별의 말을 꺼낸 그 순간, 후회로 가득 찬 찬영 역시 그 시간 동안 행복하지 않았음을, 그가 그토록 일에 매달렸던 이유가 바로 그녀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여전히 그로 인해 아파하고 있는 자신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본문 내용 중에서] “정찬형, 너는…… 네가 진짜 최악인 게 뭔지 알아? 내가 네 말처럼 구질구질하게 밑바닥을 기는 동안 너는 내 감정에 대해선 아는 척도 안 했어. 그러다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뒤늦게 이러니?”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으려면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어.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혹독하게, 잔인하게 일을 해 왔는지. 그게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어.” 이서는 차마 ‘누가 그렇게 하래?’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알 수밖에 없다. 초고속 승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실장 자리에 오른 찬형이 어떤 시간을 살아냈는지. 남들이 3년에 해내는 일을 그는 1년 안에 해내곤 했다. 주말마다 본사의 임원들이 그를 찾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남자 필요 없어.” “내가 고칠게.” “그럴 필요 없어.” “만회할 기회를 줘.” “그래야 할 이유가 없잖아.” “이서야!” “사과는 상대방이 받고 싶을 때 하는 거야,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아니라.” 이서는 가슴 가득히 쌓여 있던 차가운 눈이 엉망으로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 찬형의 묵직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널 잃어 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우리의 행복을 생각했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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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온다는 말

“나는 너하고 헤어진 적 없어. 네가 일방적으로 떠난 것뿐이야.”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비겁하게 숨어 버린 널, 찾아낸 것뿐이야.” 사랑하는 규혁과의 행복한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덫에 걸려 버렸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덫에. 졸지에 공금 횡령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믿어 주는 남자에게 행여 피해를 줄까 봐 윤수는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그땐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4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차갑게 변해 버린 규혁의 뒤에 커다란 아픔이 감춰져 있다는 걸, 그를 위해 떠나온 것이 사실은 자신의 이기적인 판단이었다는 걸 윤수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보며 깨닫게 된다. 이미 끝나 버린 인연이라 생각했건만, 사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한 번도 끝나지 않았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남자의 커다란 사랑 앞에서 그녀는 이제 용기를 내어 본다. “첫눈 오는 날, 내가 오빠 보러 갈게.” [본문 내용 중에서] “여긴 어떻게 찾았어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얘길 물으려고 찾아온 건가요?” “서울로 올라갈 준비부터 해.” “무례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너만큼 무례하긴 힘들어.” 윤수는 아르바이트생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가라앉을 길 없는 파란 사이로 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지?’ 불안처럼 내려앉는 감정을 비웃듯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4년이야.’ 헤어진 지 벌써 4년. 변한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눈빛이든, 말투든, 마음이든 간에.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윤수가 말했다. “이별은 누구에게든 무례한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은…….” “오래전 일이었다고 지껄이려는 거면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규혁은 4년이 지나는 동안 너를 찾아 헤맨 기억밖에는 없다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윤수의 행방을 찾았다. 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꼭꼭 숨어 버린 그녀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기만 했다. 윤수를 닮은 사람을 봤다는 소리만 들어도 하던 일을 제쳐 두고 단걸음에 달려갔다. 그곳이 어디가 됐든 상관하지 않았다. 초대 같은 건 받은 적 없지만 그는 윤수와 친한 이들의 결혼식장을 빠짐없이 찾았다. 원망과 비난이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어딘가에 앉아 있을지 모를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윤수는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4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할 말을 잃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규혁이 말했다. “나는 너하고 헤어진 적 없어. 네가 일방적으로 떠난 것뿐이야.” 윤수는 그의 말에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비겁하게 숨어 버린 널, 찾아낸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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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남자

*본 작품은 기존 출간 작품을 15세 이용가로 재편집한 개정판입니다. 이용하시는 데 참고 바랍니다. “여기에서 키스하면 잡아가요?” “뭐?” “못 참겠어요.” “나가자.” 매사에 신중하고 관계에 있어선 소심하기까지 해서 사랑조차도 돌다리를 두드리듯 조심스러웠던 희주. 그저 ‘나쁜 남자’의 전형을 구경하러 나간 소개팅 자리, 그 남자와 무려 키스까지 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던 대범한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처음으로 가슴 설레게 한,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수컷 냄새 가득한 이준을 볼 때마다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것들은 미덥지 못한 것이라고,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믿어 왔건만, 그렇게 오랫동안 쌓여 온 신념의 체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진짜 ‘어른 남자’를 만난 이후. 신중한 남자 한이준, 신중하다 못해 답답하기까지 한 장희주. 두 사람의 태풍 같은 러브 스토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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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 작가 모음집

“세상에 없어도 되는 게 후회라고 생각했어. 말 그대로 후회니까. 그런데 네가 떠나고 난 뒤에 그 생각이 바뀌었어. 후회를 할 수 있는 건 행운이야.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만큼 후회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사랑은 해야지, 하지 말아야지, 다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려고 마음먹어도 결국 사랑이 시키는 대로 될 뿐이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너무나 바쁜 그로 인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지오는 지치고 지쳐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난다. 그렇게 헤어졌다 생각했던 남자가 어느 날 그녀의 앞에 다시 찾아오고, 지오에게 잘못을 빌며 사랑을 고백한다. 절절한 그의 사랑 고백에 여전히 수한을 사랑하는 지오는 흔들리게 되는데……. “열등감이라고 해두자. 극복하지 못한 패배 의식이든지.” “그거 내가 가질게.” “뭐?” “오빠가 말하는 열등감, 패배 의식 나한테 달라고. 오빠한테는 그런 거 안 어울려.” 저녁을 먹기 위해 들른 막창집에서 아주 오랜만에 선배의 전 남자 친구인 강훈과 재회하게 되었다. 학교 선배이자 룸메이트였던 정윤과 강훈은 누구나 부러워했던 커플이었다, 강훈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회사가 망하기 전까지는. 강훈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결혼을 약속했던 선배는 그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선배에게 버림받은 그가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강훈과의 인연은 끝났다. 그런데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안쓰러움과 연민이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도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고 사람들을 대하는 그를 보며 언젠가부터 그를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날마다 그를 만나면서 그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한 발짝 다가서려 할 때마다 그에게서 뭉근한 선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다시 만난 강훈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기 시작한 슬아. 그녀는 과연 그와 연애, 할 수 있을까? *본 작품은 기존 출간 작품을 15세 이용가로 재편집한 개정판입니다. 이용하시는 데 참고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다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스물둘 유안과 스물셋 서훈은 부모님의 강요로 결혼을 했다. 스물셋 유안과 스물넷 서훈은 부모님의 강요로 이혼을 했다. 그저 서먹하기만 했던 서로에게, 결혼 생활에 차츰 적응을 할 무렵 일방적으로 당한 이혼은, 두 사람에게 폭행이자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남들과 다른, 평범하지 못한 결혼과 이혼. 그 아픔의 시간들을 그저 견디면서 지내 온 삶은 어두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서로를 잊지도, 지우지도 못한 채 아주 가끔씩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 오던 두 사람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단순히 불같은 사랑이 아니다. 연민과 미안함, 그리고 유일한 내 편을 얻은 것 같은 안도감……. 그런 감정들은 서훈과 유안을 단단히 결속한다. 그리고 둘의 오래된 상처를 아물게 한다. “유안아,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여전히 어둠 속이겠지, 캄캄하고 아득한.” “나는 너하고 헤어진 적 없어. 네가 일방적으로 떠난 것뿐이야.”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비겁하게 숨어 버린 널, 찾아낸 것뿐이야.” 사랑하는 규혁과의 행복한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덫에 걸려 버렸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덫에. 졸지에 공금 횡령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믿어 주는 남자에게 행여 피해를 줄까 봐 윤수는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나 버린다. 그땐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4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차갑게 변해 버린 규혁의 뒤에 커다란 아픔이 감춰져 있다는 걸, 그를 위해 떠나온 것이 사실은 자신의 이기적인 판단이었다는 걸 윤수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보며 깨닫게 된다. 이미 끝나 버린 인연이라 생각했건만, 사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한 번도 끝나지 않았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남자의 커다란 사랑 앞에서 그녀는 이제 용기를 내어 본다. “첫눈 오는 날, 내가 오빠 보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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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남자

“네가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알아? 사랑스러워 미치겠는데 너란 여자가 너무 잘나서 내색조차 못했어. 네가 내 마음을 알아?” 상사만 아니었다면 진즉 솔직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녀를 얼마나 원하는지. 그것이 자격지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랑하는 여자이기 이전에 존경하는 선배이자 상사였던 그녀, 서단주. 감히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는 불경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들. 긴 시간의 끝에서 그녀의 애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단주는 멀기만 한 여자였다. 쉽게 꿈꿀 수 없고, 함부로 생각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갈증이 나는 여자. “내게도 열등감이 있었어. 나이도 많지, 게다가 지헌 씨는 인기도 많잖아. 왜 키스 말고 다른 건 안 해, 라고 물을 자신이 없었어.” 3년 2개월 동안 사귄 남자에게 환승 이별을 당한 뒤, 누군가를 만나는 것조차 시들해질 무렵, 무슨 일이든 잘하는 남자, 정지헌과 썸을 타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리고 직장 부하 직원인 그와. 썸을 종료하고 그와 연인이 되었지만, 그와의 거리는 여전히 멀기만 했다. 나이도 많고, 상사인 자신이 부담스러울까 봐, 아니, 사실은 그에게 거절을 당할까 봐, 그에게 묻지 못했다, 왜 키스 말고 다른 건 하지 않느냐고. 그 밤, 같은 공간에 들어선 그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본문 내용 중에서] “한 번만 뒤로 하자.” “싫어.” “한 번만 하게 해줘.” 그는 단주의 눈동자에 깃든 갈등의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약속해.” 간절한 그의 눈빛에 마음이 물러졌다. “한 번만이야.” “그래, 한 번만이야.” 상이라도 주듯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엎드려.” “다신 안 할 거야.”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게 억울한 듯 단주가 전제를 거듭 확인했다. “엉덩이 힘 빼.” 한쪽 팔로 그녀의 배를 들어 올린 지헌이 제법 풍만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묘한 기분을 느낀 단주가 그를 돌아봤다. “그런 거 하지 마.” “맞는 기분이야?” “하지 마.” 단주가 정색을 했다. 괘씸할 정도로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 유두를 내려다보며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흥분했나 봐요?” “존댓말 쓰지 마.” 단주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둔 말을 터뜨리듯. “그럼 솔직해지든지.” 지헌이 한 번 더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쳤다. “아읏!” 탐스럽게 출렁거리는 엉덩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음험했다. “흥분하는데 왜 아닌 것처럼 굴어?” “차, 창피하니까 그러지.” “네가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알아? 사랑스러워 미치겠는데 너란 여자가 너무 잘나서 내색조차 못했어. 네가 내 마음을 알아?” 피식피식 웃기까지 하는 그를 돌아보며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닌 줄 알아? 내가 지헌 씨를 얼마나 원했는지…….” “그럼 한 번은 이렇게 박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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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우리가

만약에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다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스물둘 유안과 스물셋 서훈은 부모님의 강요로 결혼을 했다. 스물셋 유안과 스물넷 서훈은 부모님의 강요로 이혼을 했다. 그저 서먹하기만 했던 서로에게, 결혼 생활에 차츰 적응을 할 무렵 일방적으로 당한 이혼은, 두 사람에게 폭행이자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남들과 다른, 평범하지 못한 결혼과 이혼. 그 아픔의 시간들을 그저 견디면서 지내 온 삶은 어두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서로를 잊지도, 지우지도 못한 채 아주 가끔씩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 오던 두 사람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단순히 불같은 사랑이 아니다. 연민과 미안함, 그리고 유일한 내 편을 얻은 것 같은 안도감……. 그런 감정들은 서훈과 유안을 단단히 결속한다. 그리고 둘의 오래된 상처를 아물게 한다. “유안아,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여전히 어둠 속이겠지, 캄캄하고 아득한.” [본문 내용 중에서] “내 원망 많이 했지?” 쓰게 웃는 그를 바라보며 유안이 대답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조금은 했어.”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라고 하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나니까 비로소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더라.” “지금은 원망 같은 거 안 해. 그땐 나도, 오빠도 어리기만 했잖아. 그 나이에 겪기엔 버거운 일이었어.” “서른이 넘어서야 그 무렵의 내가 비겁했다는 걸 깨달았어.” “그랬던 적 없어. 그건 내가 알아.” 항의하기 위해 본가로 쫓아간 그가 아버지에게 감금을 당하다시피 했다는 걸 정범을 통해 들었다. 그런데도 그를 원망했던 건 자신과 마음을 맞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되고 난 뒤에라도 널 찾는 게 옳았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무슨 뜻이냐는 듯 서훈이 그녀를 바라봤다. 유안이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해?” 서훈은 그녀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자주 해온 사람처럼 덤덤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죄책감에 시달리진 않았을 거야.” “죄책감? 오빠가 왜 그런 걸 느껴?” “너는 기댈 곳 없이 혼자였을 테니까.” 유안의 눈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내가 잠깐 오빠를 원망했다고 말한 건 우리가 겪은 그 일이 화가 나서 그랬던 것뿐이야.” 유안은 생각했다. 서훈도, 자신도 ‘이혼’이라는 말을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들어 한다는 걸. 그는 빗줄기가 빗금을 그어대는 차창을 바라봤다. “만약에 우리가……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함께 힘들어 하고 함께 고통스러워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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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 미? (Why me?)

“결혼 전까지는 순결을 지킬 생각이야. 사랑은 평생 할 수 있지만 참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아. 섹스를 하는 것보다 손만 잡고 자는 게 내 자신한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잔인한 일이라는 것만 기억해 줘.” “내가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날 사귈 차례에 와서 그딴 다짐을 해?” 하필 왜, 도대체 왜! 몸도 마음도 활짝 여는 진정한 사랑을 하겠다고 다짐한 그 순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던 근사한 남자에게 고백도 받고 연인이 되어 행복하기만 한 그 순간, 그 남자는 ‘혼전 순결’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다짐을 한 걸까? 그 남자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손이 떨리고, 바라보기만 해도 키스하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은데 왜 죽을힘을 다해 참아야 하는 걸까? 그 남자 역시 나를 사랑하고, 나만 보면 키스하고, 안고 싶어 하는데 도대체 왜 그딴 다짐을 해서는 나를 남자에게 목매는 구질구질한 여자로 만드는 걸까? 도대체 왜? Why me? 순결을 고집하겠다는 남자와 그런 그의 사랑을 욕망하는 여자의 달콤 살벌한 연애 이야기. [본문 내용 중에서] “이랑아, 오해하지 마. 너라서 더 참아 보고 싶은 거야. 나라고 이 상황이 즐겁고 기쁜 줄 알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왜 자꾸 하는데?” 이랑이 언성을 높였다. 처음 듣는 그녀의 화난 목소리에 재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랑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런 일로 다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얼마든 이런 일로 다툴 수 있다. 중요한 건 재혁과 자신의 위치가 반대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순결을 고집하겠다는 남자와 그런 그의 사랑을 욕망하는 여자라니. “후우!”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나도 하고 싶어. 미치게 네가 갖고 싶어.” “헛소리 되게 잘하는 거 알아요?” “진심이야. 진심으로 널 원하는데, 안고 싶고, 빨고 싶고, 뒹굴고 싶은데…… 참고 견디는 게 훗날 우리 둘에게 더 큰 기쁨으로 기억될 것 같아서 죽을힘을 다해 견디는 거야.” 이랑이 콧방귀를 뀌었다. “넌 아웃이야.” “뭐?” 재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웃이라니, 게다가 너라니. “내가 널 정말 사랑하거든. 그래서 네가 그 거지 같은 혼전 순결 타령을 해도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널 사랑해.” “나도 널 사랑해.” “시끄러워.” “윤이랑!” 계속되는 그녀의 막말에 재혁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인상 써도 하나도 안 무서워. 넌 내 자존심을 있는 대로 뭉갰어.”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답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찰나, 이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하고 결혼은 할 건데, 그건 안 할 거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혼전 순결, 끝까지 지켜. 난 꽉 채워서 3년 동안 혼후 순결을 지켜 줄 테니까.” 한껏 그에게 눈을 흘긴 이랑은 씩씩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민망할 정도로 젖은 두 다리 사이가 축축해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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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차이

“네 살 차이, 여기도 있잖아.” “뭐?” “꼭 위로만 네 살이 많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저 친구의 동생일 뿐이었다. 같은 빌딩에서 근무하는 진원이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하며 일곱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출퇴근을 하고, 같이 저녁을 먹고, 때로는 점심을 함께 하면서도 친구의 동생인 진원은 그녀에게, 절대로 ‘남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의 남자를 찾아 헤매던 그녀에게 자신 역시 네 살 차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무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몰랐다. 진원이 자신보다 한참, 그것도 아주 한참 크다는 걸. 그의 미소가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로 근사하다는 걸. 그런 진원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며 웃는 게 서운할 만큼 싫다는 걸. 항상 곁에서 자신을 위해 주고 배려해 주던 그의 온기가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그를 ‘남자’로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문 내용 중에서] “네 살 차이, 여기도 있잖아.” “뭐?” 유미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마치 진원에게 지금 제정신이니, 하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꼭 위로만 네 살이 많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최 기사, 너는 아니거든.” “이유는?” “그야 너는…….” “내가 최예원의 동생이라서?” “그것도 그렇고.” 유미는 그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의 동생과 연애라니, 그리고 결혼이라니. 그녀의 기준에서 그건 상도덕을 저버리는 것 이상으로 부도덕한 일이었다. “다른 이유는?” “그건…… 야, 가슴이 설레야 뭘 해도 하지.” 사실 유미는 당황했다. 후미진 골목에서 선배에게 기습적으로 입맞춤을 당했던 순간의 기억이 떠오를 만큼. 진원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진원은 사촌 동생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그런 관계였다. 베고 있으면 유난히 잠이 잘 오는 폭신한 베개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사이였다. 진원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유미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네 누나가 알면 날 죽이려고 할 걸. 넌 핏줄이니까 못 죽일 거고.” “한 번쯤 생각해 봐.” “뭘?” “아래, 위로 네 살 차이.” “최진원, 시작도 하기 전에 재 뿌릴 거야? 그리고 너, 나한테 관심 있니?” “바보냐? 아닌데 이 주말에 복잡한 쇼핑몰까지 따라가?” “최진원!” “좋아해. 누나 친구한테 운전기사 노릇 해 주겠다고 자청하는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어. 좋아하는 여자한테나 그럴 수 있는 거지. 하여간 둔해.” 유미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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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선 남녀

“생각할 시간을 갖자.” “무슨 생각?”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생각. 너도, 나도 행복하지 않아. 그만 불행했으면 해.” 연애한 지 3년 반. 어느덧 서로에게 무심하고 차갑게 변해 버린 그와 그녀. 더 이상 가슴 떨리는 설렘도, 서로에 대한 기대도 없이 그저 의무적으로 전화하고, 만나고, 관계를 맺고. 그런 권태로운 시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예진은 성훈에게 시간을 갖자고 이야기하고, 그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 역시 동의한다. 생각을 갖자는 말…… 사실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는 것임을 알면서도 권태로운 관계를 이겨낼 수 없어,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다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소개팅 자리에 나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보게 되고, 그제야 알게 된다, 그들은 한 번도 이별한 적이 없었음을. 사랑에 있어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불같은 사랑의 시간이 지나고 권태기를 맞이한 예진과 성훈. 두 사람은 권태기를 극복하고 다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본문 내용 중에서] “대단했어.” 성훈이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말할 기운도 없어. 아아…….” “왜 이렇게 예민해?” 예진은 그의 말이 칭찬처럼 들렸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첫 번째 섹스의 충격을 확인하듯 한 번의 섹스를 더 했다. 첫 번째 섹스보다 더한 환희와 쾌락에 예진은 울음을 터뜨렸고 성훈은 신음을 감추지 못했다. 예진이 몸을 돌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여자 누구야?” “모르는 여자야.” “모르는 여자를 왜 만나?” 성훈은 당장이라도 삼키고 싶을 만큼 탐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은혁이 와이프 부탁이라 거절하기 힘들었어.” “거절하기 싫었겠지.” “네가 나한테 그런 심술을 부릴 처지가 아닐 텐데. 그 자식, 누구야?” “너보다 멋있는 남자.” 성훈이 눈을 부라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진은 그의 그런 행동이 ‘시늉’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훈이 그녀의 코끝을 쥔 채 말했다. “다시 말해 봐.” “너보다…… 아흣!” 어깨를 움츠린 예진은 유두를 입에 물고 자근거리는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츄웁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두가 빨릴 때마다 온몸이 그에게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젖은 유두를 손끝으로 지분거리며 그가 물었다. “왜 이렇게 달아?” “몰라.” 성훈은 두 손으로 움켜쥔 가슴을 가운데로 모았다. 그는 젖가슴 사이에 만들어진 선명한 골짜기를 혀로 핥았다. “아아!” “간지러워?” “하아…….” 우리, 어떻게 할래? 내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때? 예진도 성훈도 그런 말 같은 건 묻지 않았다. 바르르 떨리는 숨을 내쉬며 예진은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아읏, 아읏…….” 가슴을 삼킨 성훈이 뺨을 씰룩거릴 때마다 소스라치듯 예진이 가슴을 들썩거렸다. 예진은 애가 타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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