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친구가 자살했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남자, 권민헌.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긴 숫자와 똑같은 번호판의 차량, 친구의 프로필 사진에 찍힌 것과 같은 차종, 친구의 좋아요가 우수수 달린 SNS. 그 남자는 대체 친구와 무슨 관계였을까? 애써 생각을 떨쳤지만 자꾸만 이상한 곳에서 그와 마주치는데.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는 태이에게 계속 다가오는 민헌. 소중한 친구를 잃었음에도 그로 인해 다시 일어선다. “나도 다 알면서 넘어가는 거야. 그냥 네가 좋아서.” “…….” “태이야. 진심이라곤 해 줘. 난 가족한테도 이런 말 안 해.” 그가 속삭이는 다디단 말을 들으면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길게 갈 수 없는 관계인데, 인생을 다 열어 달라는 민헌의 손을 잡고 싶다. 그가 제 일상을 끊임없이 뒤엎을 것을 알면서도. *** “우태이, 내가 어디가 좋아?” 태이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바라보자, 눈썹을 치켜올린 채 당당한 민헌의 낯짝이 보였다. “좋은 구석이 있으니까 사귄다고 한 거 아니야.”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잠시 동안 고기를 자르고, 파프리카, 양파, 버섯까지 쏟는 소란 속에서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마침내 태이가 치익 소리 사이로 중얼거렸다. “귀여워서.” “뭐?” 저렇게 윽박지르는 사람한테 또 얘기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불을 줄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귀여워서 사귀자고 한 거야.” 세속적인 세상에 누구보다 익숙할 텐데도 은근히 겁이 많고, 친절하다가 갑자기 미친 짓을 저지르고, 애교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제 욕심대로 쩨쩨해졌다. 요약하자면 방어적이고, 제멋대로였다. 못된 특징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솔직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귀엽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귀여워?” 바보같이 중얼거리는 게, 귀엽잖아. 일러스트: 서나원
🌟 로맨스 소설 중 상위 7.62%
평균 이용자 수 3,442 명
* 100명이 선택하면 '명작' 칭호가 활성화 됩니다.
'명작'의 태양을 라이징 해보세요.
알던 사이는 모르느니만 못하다. 가령, 오랜만에 만난, 유명한 야구 선수가 된 중학교 동창이라든가. “구지우?” 나는 익숙한 듯 낯선 얼굴에 기절할 듯 놀라 뒷걸음질 쳤다. 고등학교 시절, 이 벤치에 앉아 말간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했던 그때의 차인한과는 달랐다. TV 광고나 스포츠 뉴스, 내가 들고 있는 음료수병의 라벨 속 얼굴이 되레 더 익숙했다. “번호 줘.” “…….” “사 년 동안 한 번도 못 봤잖아.” 새삼 우리의 세계가 다르다고 깨닫는 것도 잠시, 그 애는 또 한 번 잔잔하기만 한 내 삶을 흔들었다. *** 차인한은 처음 공을 쥘 때부터 야구를 잘했다. 야구 신인의 역대 최대 계약금, 누구나 선망하는 1차 지명까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구지우는 그에게 당연하지 않았다. 쉼 없이 달리던 모범생은 마침내 그를 두고 떠났다. “연락하지 마.” “뭐?” “네가 왜 키스했는지…… 이유야 뭐가 됐든 하필 지금……. 난 수능이 세 달밖에 안 남았는데…….” 키스 한 번에 사 년이나 연락을 끊을 줄이야. 그러더니 이제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좆 까.” *** “우리 사 년 만이야. 네가 이러는 거 그냥 나랑 자려는 핑계처럼 느껴져.” “구지우, 난 너 처음 만날 때부터 좋아했어.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밤마다 너한테 갔겠냐. 수능 끝나면 고백하려고 했어.” “…….” “나랑 사귀어 주면 평생 섹스 안 해도 돼.” ……이런 바보 같은 말에 긴장하다니. 아, 진짜. “너 계속 그딴 식으로 농담하면…….” “농담 아니야. 널 잊으려고 했는데 잘 안됐고, 내 마음이…… 니 말처럼 미련인지 지랄인지, 그딴 게 이만큼 오래 갈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다 알려 주면 되잖아.” 말은 느렸다가 점차 빨라졌다. 바닥에 엎지른 물처럼 모든 곳을 덮었다. “그냥 널 다시 보고 싶었어.”
10살. 유력가에 팔려 가듯 혼인했다. 열 살 차이 나는 남편과의 생활은 사랑 없이도 그럭저럭 평안했다. 드디어 마음 둘 곳을 찾았다 생각했는데. 남편이 역모죄로 죽었다. 그리고 나는, 황제의 편에 선 그에게 상속됐다. 그렇게 죽음을 피했다. “반역자는 죽었습니다. 그대는 제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나와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떠나고 싶다는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골방으로 내치고 더 좋은 혼처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그 어떤 것 하나 먼저 여쭙지 않으시더니. “저는 형수님을 연모했습니다. 형수님께서 안 계시면 저는 세상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 이제는 나를 연모한다 하시는군.
10살. 유력가에 팔려 가듯 혼인했다. 열 살 차이 나는 남편과의 생활은 사랑 없이도 그럭저럭 평안했다. 드디어 마음 둘 곳을 찾았다 생각했는데. 남편이 역모죄로 죽었다. 그리고 나는, 황제의 편에 선 그에게 상속됐다. 그렇게 죽음을 피했다. “반역자는 죽었습니다. 그대는 제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나와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떠나고 싶다는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골방으로 내치고 더 좋은 혼처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그 어떤 것 하나 먼저 여쭙지 않으시더니. “저는 형수님을 연모했습니다. 형수님께서 안 계시면 저는 세상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 이제는 나를 연모한다 하시는군.
10살. 유력가에 팔려 가듯 혼인했다. 열 살 차이 나는 남편과의 생활은 사랑 없이도 그럭저럭 평안했다. 드디어 마음 둘 곳을 찾았다 생각했는데. 남편이 역모죄로 죽었다. 그리고 나는, 황제의 편에 선 그에게 상속됐다. 그렇게 죽음을 피했다. “반역자는 죽었습니다. 그대는 제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나와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떠나고 싶다는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골방으로 내치고 더 좋은 혼처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그 어떤 것 하나 먼저 여쭙지 않으시더니. “저는 형수님을 연모했습니다. 형수님께서 안 계시면 저는 세상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 이제는 나를 연모한다 하시는군.
알던 사이는 모르느니만 못하다. 가령, 오랜만에 만난, 유명한 야구 선수가 된 중학교 동창이라든가. “구지우?” 나는 익숙한 듯 낯선 얼굴에 기절할 듯 놀라 뒷걸음질 쳤다. 고등학교 시절, 이 벤치에 앉아 말간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했던 그때의 차인한과는 달랐다. TV 광고나 스포츠 뉴스, 내가 들고 있는 음료수병의 라벨 속 얼굴이 되레 더 익숙했다. “번호 줘.” “…….” “사 년 동안 한 번도 못 봤잖아.” 새삼 우리의 세계가 다르다고 깨닫는 것도 잠시, 그 애는 또 한 번 잔잔하기만 한 내 삶을 흔들었다. *** 차인한은 처음 공을 쥘 때부터 야구를 잘했다. 야구 신인의 역대 최대 계약금, 누구나 선망하는 1차 지명까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구지우는 그에게 당연하지 않았다. 쉼 없이 달리던 모범생은 마침내 그를 두고 떠났다. “연락하지 마.” “뭐?” “네가 왜 키스했는지…… 이유야 뭐가 됐든 하필 지금……. 난 수능이 세 달밖에 안 남았는데…….” 키스 한 번에 사 년이나 연락을 끊을 줄이야. 그러더니 이제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X 까.” *** “우리 사 년 만이야. 네가 이러는 거 그냥 나랑 한 번 해 보려는 핑계처럼 느껴져.” “구지우, 난 너 처음 만날 때부터 좋아했어.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밤마다 너한테 갔겠냐. 수능 끝나면 고백하려고 했어.” “…….” “나랑 사귀어 주면 평생 스킨십 안 해도 돼.” ……이런 바보 같은 말에 긴장하다니. 아, 진짜. “너 계속 그딴 식으로 농담하면…….” “농담 아니야. 널 잊으려고 했는데 잘 안됐고, 내 마음이…… 니 말처럼 미련인지 X랄인지, 그딴 게 이만큼 오래 갈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다 알려 주면 되잖아.” 말은 느렸다가 점차 빨라졌다. 바닥에 엎지른 물처럼 모든 곳을 덮었다. “그냥 널 다시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