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일하는 가게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메뉴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추천해 줄래요?” 나긋한 어조와 달리 노골적인 눈빛. 단정한 이목구비와 달리 소매 사이로 언뜻 비치는 문신.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서늘한 눈매. “취향 알고 싶어서. 참고해 두려고.” 묵직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수작질. 그런 모순되는 점들이 찜찜했다. 또 봐요. 010-xxxx-xxxx 남자가 남겨주고 간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오빠 윤정현의 부고 소식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은성은 정현의 짐을 정리하던 도중 남자의 명함을 발견한다. 오빠의 죽음에 의심을 품고 있던 그녀는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 마는데…. “생각보다 일찍 전화했네?” 수화기 너머로 첫 만남 때처럼 웃음을 품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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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한테서 역겨운 냄새가 나. 일종의 정신병이라던데.” 여름 파티에서 마주친 남자는, 분명 어릴 적 다락방에 갇혀 있던 그 애의 이목구비 그대로였다. 그때보다 선이 굵어지고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어도, 상대를 조이는 듯한 서늘한 눈빛만큼은 여전했다. 남자는 온갖 잡일이나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굴욕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저와 달리 그는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그게 신기했다. “나도…… 그쪽처럼 되고 싶어서 그래요.” “…….”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거, 끝내고 싶어서.” 그래서 자꾸 눈길이 갔고. “우리 같이 도망칠래요?” 끝내 마음까지 열고 말았다. 하지만 유헌이 말하는 ‘사랑’은 맥락 없는 집착이었고, 서화는 그게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 * * 세뇌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미 경험해 본 유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서화에게 매일 사랑을 세뇌한다면 언젠가는 그녀도 저를 받아들여 줄 거라고, 굳게 확신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매 순간 귓가에 속삭여서 오로지 내 생각으로만 머릿속을 채워 넣으면 된다.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하루 전체를 나만 보게 하고, 내가 주는 쾌락에 빠져 있게 하면서. “사랑해, 서화야.” “……나는.” “응, 알아. 서화도 나 사랑하는 거.” 제멋대로 감정에 이름을 붙인 유헌이 부드럽게 뺨을 쓸며 속삭였다. “모르겠으면, 그냥 외워. 자기야, 쉽잖아.”
“오빠라면 해결 가능할 것 같아서요. 제 불감증.” 흑역사 같은 과거 경험으로 연애와 담을 쌓게 된 윤다란. 어떤 남자를 만나도 욕구는커녕 거북함만을 느끼자, 그녀는 스스로가 불감증이 아닐지 의심하기까지 한다. 그러던 중, 출장으로 비어있어야 할 오빠의 집에서 잘생긴 오빠 친구, 백도하의 수음을 목격한다. “……미쳤다.” 난생처음으로 야릇한 기분을 느낀 다란은 그를 도발한다. “오빠 마음 같은 건 안 바랄게요. 열 밤만, 나랑 만나 봐요.” “감당도 못 할 짓하네. 자꾸.” 작은 헛웃음과 함께 도하의 눈빛이 짙어졌다. “미안한데, 내가 좀 양심이 없어서. 친구 동생한테도 좆 세우는 새끼거든.” 다란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중심부가 놀라울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게, 다란아.” “…….” “모를 수 있었잖아. 왜 건드려서 몰라도 될 걸 듣고 그래.” *** “이렇게 잘 느끼는데. 불감증은 무슨.” “하응, 읏, 후으……!” “순 거짓말쟁이네. 윤다란.”
오래전, 나는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끊임없이 ‘이유’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 애'에게서 한 번 더 버려졌을 때, 내 속은 하염없이 허물어졌다. 나는 왜 버려졌을까. 내가 못나서? 내가 맨날 울어서? 그러나 이유를 찾기도 전에 내 인생은 진창까지 곤두박질 쳤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주인'을 잡으러 온 한 남자 앞에서 무릎 꿇고 있었다. “저,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어제까지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겨우 도망쳐 나온 거예요.” 내가 힘겹게 말을 잇는 동안 남자의 시선은 쭉 내 입술에 닿아 있었다. 내 말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새끼가 가진 거 말이야. 다 필요 없었는데,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생겼거든.” 불길한 직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그의 눈빛이 너무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어서. “앞으로는 내 강아지 해, 동동아.” “네?” “내가 더 잘 키워줄 수 있어.” . . . 그가 내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를 위해 어떤 짓도 할 수 있었다. 개처럼 짖으라 하면 짖고, 꼬리를 흔들라고 하면 흔들지 뭐. 어차피 버릴 목숨인데. 죽음과 동시에 사라질 수치일 텐데. 나는 개밥을 먹으며 바닥을 굴렀던 지난 생활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