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 인생에 유일한 건 사준, 나 하나라고. 왠지 알아?” “다, 죽었거든.” “종희가 좋아한 건, 다 죽어버렸다고.” 이종희. 어쩌다 이 여자가 좋아하는 건 다 죽어버리기를 바랐던 걸까. 교실에 조용히 앉아 존재감이 없던 여자아이는 1학년 땐 인사를 건네왔고, 2학년 땐 선물을 갖다 바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종희는 ‘사준의 종’으로 이름이 회자되었다. 뭐가 됐든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뒤꽁무니 빠지게 쫓아다니던 여자애 중에선 단연 그 질김이 1등이었다. 결이 다른 추종이랄까. 그 존재감 없던 여자아이는 어느샌가 사준의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너 사준 좋아해?” 종희에게는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종희는 준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준을 위해서는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어떤 답례도 바라지 않는 양 너무도 당연한 베풂이었다. “사준의 종이래. 널 보고.” 당사자 앞에서 ‘종’이라 듣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종희는 그 말이 싫지가 않았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변하지 않는 나무처럼 묵묵히. 하지만 틀어져 버린 그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가 없어져 버리고, 그를 피하듯 도망쳤지만 종착역은 다시 사준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 내가 제일 혐오하는 거. 그걸 다 해. 근데도 나는 왜, 너를 놓지 못할까.” 다시 만난 사준은 예전과 달랐다. 그의 관심은 집착으로 변해 있었다. “튀는 건 참 잘하지. 변하기도 참 잘 변해. 응?” 6년 만의 재회는 도마 위에 올려진 회처럼 홀딱 벗겨진 나신인 채였다.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오기로 뭉쳐진 집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네 감정이 두려웠다. 뒤틀린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이게 사랑이라면, 이것도 사랑이라면. 차라리 그 편이 더 쉬운 길일지도 모르겠다고. “너만 내 옆에 있으면 돼. 나무처럼.”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종희를 삼킬 듯이 내려다봤다. 그때는 몰랐다. 이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 로맨스 소설 중 상위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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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까칠함과 예민을 저 혼자 품고 사는, 봐 줄 만한 건 잘생긴 얼굴밖에 없는 무제윤 팀장. 하지만 예쁜 것, 잘생긴 것, 아름다운 것을 삶의 활력소로 삼는 지수에게 그의 모난 성격 정도는 흐리게 넘겨줄 만했다. “남의 몸 만지면 기분 좋습니까?” 자신이 상사의 몸을 만진 추행범으로 몰리기 전까지는! “만져볼게요. 그거라도 원하시면요. 현장 검증이라도 거치면 제가 기억날지도 모르죠.” 수는 오해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한편 제윤은 그 사건 이후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즐겼잖아. 이렇게 내 손길이 닿는 거. 은근히 기다렸던 거 아냐?” 덥석덥석 잘도 만질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자신을 피하려는 지수가 자꾸만 신경 쓰이는 제윤은 결국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되는데……. *** “가을이란 게 참 이상하죠.” 제윤이 느지막이 숟가락을 손에 쥔 채 그녀를 바라보며 비스듬히 웃었다. “그 연애, 나도 당기네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입만 움직이는 미소였다. *15세로 개정한 버전입니다.
“걔 인생에 유일한 건 사준, 나 하나라고. 왠지 알아?” “다, 죽었거든.” “종희가 좋아한 건, 다 죽어버렸다고.” 이종희. 어쩌다 이 여자가 좋아하는 건 다 죽어버리기를 바랐던 걸까. 교실에 조용히 앉아 존재감이 없던 여자아이는 1학년 땐 인사를 건네왔고, 2학년 땐 선물을 갖다 바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종희는 ‘사준의 종’으로 이름이 회자되었다. 뭐가 됐든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뒤꽁무니 빠지게 쫓아다니던 여자애 중에선 단연 그 질김이 1등이었다. 결이 다른 추종이랄까. 그 존재감 없던 여자아이는 어느샌가 사준의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너 사준 좋아해?” 종희에게는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종희는 준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준을 위해서는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어떤 답례도 바라지 않는 양 너무도 당연한 베풂이었다. “사준의 종이래. 널 보고.” 당사자 앞에서 ‘종’이라 듣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종희는 그 말이 싫지가 않았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변하지 않는 나무처럼 묵묵히. 하지만 틀어져 버린 그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가 없어져 버리고, 그를 피하듯 도망쳤지만 종착역은 다시 사준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 내가 제일 혐오하는 거. 그걸 다 해. 근데도 나는 왜, 너를 놓지 못할까.” 다시 만난 사준은 예전과 달랐다. 그의 관심은 집착으로 변해 있었다. “튀는 건 참 잘하지. 변하기도 참 잘 변해. 응?” 6년 만의 재회는 도마 위에 올려진 회처럼 홀딱 벗겨진 나신인 채였다.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오기로 뭉쳐진 집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네 감정이 두려웠다. 뒤틀린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이게 사랑이라면, 이것도 사랑이라면. 차라리 그 편이 더 쉬운 길일지도 모르겠다고. “너만 내 옆에 있으면 돼. 나무처럼.”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종희를 삼킬 듯이 내려다봤다. 그때는 몰랐다. 이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열여덟, 아버지의 사업 부도와 함께 시이는 떠밀리듯 거제도로 내려간다. 무너진 집안에서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라곤 공부밖에 없던 시절. “깡패 새끼.” “순혈이라 부정은 못 하겠네.” “……개새끼.” “개새끼랑 정 좀 들자, 시이야.” 그곳에서 자존심을 건들면서도 묘하게 다정하게 구는 두현을 만난다.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시이는 두현을, 자기 자신을 외면한 채 도망쳤다. 그렇게 10년. 나아지는가 싶던 인생은 사랑하고 혐오하는 쌍둥이 언니, 지이로 인해 다시 곤두박질친다. 업소에서 일하다 도망친 언니 대신, 그녀의 행세를 하던 시이 앞에 다시 한번 그가 나타났으니까. “인생 재밌게 산 게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네.” 과거보다 더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어떤 윤곽으로 포장된 사나운 분위기. 거칠었지만 풋내났던 그 시절의 순수는 없었다. “내가, 너 한 번 놔줬지.” 한 발, 한 발 도망치듯 떠밀리던 등이 쿵. 벽에 부딪힐 때까지, 현실이 잘 인지되지 않았다. 주체하지 못하고 떨리는 턱을 두현은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불현듯 입술이 뭉개진 건 그때였다. “소문난 걸레라길래, 얼마나 화끈해졌나 기대를 좀 했더니…….왜 말이 없어?” 입술에 칠해진 붉은 립스틱을 엄지로 짓누르며 남자가 말했다. 강두현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동안 업소에서 일하던 것은 시이가 아닌 언니라는 것을. 제 속이 어떤 식으로 썩고 있었는지를.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아, 이제 이건 네 방식이 아니야?” “…….” “몸의 대화가 더 편한 거면 몸부터 맞춰도 되고.” 시이는 어느 때보다 죽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숨을 멈췄다. 턱의 떨림이 사지로 내려갔다. 가학적인 비소가 심장을 갈랐다. “네 앞에선 늘 꼴렸으니까. 어려운 것도 없지.” 신이 있다면, 정말이지 여기서 널 만나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알잖아. 너 한번 따먹는 게 내 소원이었던 거.” 강두현. 너만은. ※해당 작품은 추후 외전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세상 까칠함과 예민을 저 혼자 품고 사는, 봐 줄 만한 건 잘생긴 얼굴밖에 없는 무제윤 팀장. 하지만 예쁜 것, 잘생긴 것, 아름다운 것을 삶의 활력소로 삼는 지수에게 그의 모난 성격 정도는 흐리게 넘겨줄 만했다. “남의 좆 만지면 기분 좋습니까?” 자신이 상사의 아랫도리를 만진 추행범으로 몰리기 전까지는! “만져볼게요. 그거라도 원하시면요. 현장 검증이라도 거치면 제가 기억날지도 모르죠.” 수는 오해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한편 제윤은 그 사건 이후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즐겼잖아. 이렇게 내 손길이 닿는 거. 은근히 기다렸던 거 아냐?” 덥석덥석 잘도 만질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자신을 피하려는 지수가 자꾸만 신경 쓰이는 제윤은 결국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되는데……. *** “가을이란 게 참 이상하죠.” 제윤이 느지막이 숟가락을 손에 쥔 채 그녀를 바라보며 비스듬히 웃었다. “그 연애, 나도 당기네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입만 움직이는 미소였다.
스무 살, 희주에게 유학은 해방이었다. 그 남자, 류이석을 만나야 했던 순간을 제외하면. 2주에 한 번씩 파리의 별장에 가면, 그가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자신을 말없이 관찰했다. 그 기괴한 행위를 1년이나 지속하고 종적을 감춘 그가 스물다섯 살, 결혼 상대로 다시 등장했다. “스물다섯까진 연희주 씨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뒀잖아. 아이를 가졌다 해도 그 정도는 내가 책임져 줄 생각이었는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재밌어. 세상에 갓 눈뜬 것처럼.” 류이석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람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면실인증을 앓고 있다. 그 때문에 더 미쳐 버렸다는 소문은 파다했고, 그를 둘러싼 구설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알아본다는 얼굴이 연희주, 였다. “어떡하지. 난 연희주 씨 옆에서 숨 좀 쉬고 싶은데.” 그가 내비친 건 사랑이 아니었다. 감당하기 두려운 소유욕이다. 왜 하필 류이석의 눈에 든 게 나인 건지. 그와의 결혼만큼은 피하고 싶어 발버둥 쳐보지만,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넌 내, 빛이라니까.” 이 인연의 끝은 어딜 향하고 있을까. 일러스트: va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