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3.” 이내 이서를 따라잡은 도헌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 “사고라며. 나랑 잔 거.” “…미쳤어?” “그럼 보상해야지.” 스물 아홉의 봄. 이서는 지긋지긋하게 이어온 짝사랑을 정리하기로 했다. 화려한 여성 편력과 수차례 파혼 경력을 가진 서한그룹의 골칫거리. 그런 이도헌이 망한 집안의 딸과 친구 사이를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해줄 리도 만무하고, 무엇보다 그는 좋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7이라는 거야?” “가만히 있는데 와서 박은 거면 네 책임이지.” “…무슨….” “물론 방심하고 있었던 내 책임도 있긴 해.” 정작 그 말을 하는 도헌의 낯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데 이서는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그냥 가벼운 접촉사고야.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잖아.” “고장 나서 아예 몰지를 못하는데 고쳐주고 가야지.” “어디가 고장 났는데.” “브레이크가 안 걸려.” 하. 교통사고로 치면 외제 차를 박았는데 차주까지 아주 깐깐한 셈이었다. “후유증이 심해. 잔상이 계속 남아 있고 잠도 못 자. 멍도 잘 안 빠지고.” 엄살을 피우는 환자처럼 아쉬운 표정을 한 도헌이 막 검붉어지기 시작한 지난 밤의 흔적을 검지로 쓰윽 건드렸다. “초보인지 영 운전이 서툴더라고.” 20년을 허우적대던 어장속을 탈출하려던 순간, 무심하던 남사친이 갑자기 다정해졌다. (일러스트: VI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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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사인 게 걸려? 아니면.” 상체를 숙인 그가 오만한 입꼬리를 올렸다. “제자라서 안 되는 거예요?” “…….” “선생님.” 고액 과외를 맡았던 학생을 십 년 후 회사 상사로 다시 만났다. “말했잖아. 그냥 네 장난감이라고.” 벗어나야 하는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실컷 갖고 놀다 버려. 성에 찰 때까지.” 성마르게 비집고 들어온 혀가 깊이 얽혀들었다. 더운 온수에 서서히 익어가듯 그렇게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저도 모를 사이에.
내내 무감하던 남자의 시선이 하객석에 있는 서아를 발견했다. 피식. 한발 빠른 웃음이 그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아.” “…….” “돈 더 달라고?” 대수롭지 않은 일을 처리하듯 고요하게 대답한 그가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아무렇게나 툭 던져진 봉투가 서아의 손에 구겨졌다. “볼일 끝났으면 가 봐. 낄 자리 아닌 건 눈치로 알 텐데.” 한순간 유흥을 즐긴 그가 언젠가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른 아침 산책을 하고, 부엌에 들어가 단출한 식사를 차리고, 팔베개를 한 채 선선한 바람을 즐기는, 그런 보잘것없는 일상보다 더 잘 어울리는 지금의 삶을 찾아갈 거라는걸. “왜….” 그때가 되면 아무렇지 않게 보내주겠다고 결심했었다. 절대 짐이 되는 일 없게.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당신의 행복한 모습만 보고 아이와 함께 조용히 숨어 살겠다고. “나만큼 사랑한 사람은 없다고 했잖아.” “…….” “난 이 아이 낳을 거예요. 당신이랑 똑같이 생긴 아이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거슬리는 일인지 매일 느껴봐.” 이를 악물고 꺼낸 협박이 무색하게 도건이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서아야. 그럴 일은 없어.” “…….” “미치게 좋았던 건 맞는데.” 그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서아의 손으로 느린 시선을 내렸다. “뒤처리가 철저한 편이라. 그럴 일을 만들지 않았거든.” “…….” “내 아이 아냐.” 억지로 힘을 준 서아의 눈가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쾅. 검은 하늘이 세차게 폭우를 쏟아냈다. 소리 없는 번개가 실내를 밝히자 남자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이러면 안 되지 않나.” 호선을 그린 남자의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담긴 듯했다. 진한 알코올 냄새가 현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해 줘요.” 이런 밤에는 무슨 짓을 저지른들 괜찮지 않을까. 이 비가 모든 죄를 씻어주길. 모든 기억을 침몰시켜주길. 지금부터 있을 모든 일들은 내일이면 떠오르는 해와 함께 증발할 것이다. “해 줘요. 나도 똑같이….” 절친과 바람난 애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친구를 이용하기로 했다. 시선을 내린 상대는 곧 능숙하게 현서의 머리를 감싸고 문을 닫았다. “후회하지 마.” 그런데.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어도.” “…….” “나갈 땐 안 돼.”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표지 By hana(@han_A01) 타이포 By 타마(@fhxh0430)
“흥분돼. 네가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망친 품. 하지만 그곳 역시 수현에겐 또 다른 감옥이었다. “누가 봐도 불행에 젖은 눈빛.” 다정함에 기대 마음을 고백해 버린 그날. 그가 원한 것이 제 마음이 아님을, 그저 몸을 나누자는 뜻이었음을 알아 버렸으니까. “그렇게 버티면 좀 달라져?” “……버티니까 달라지더라고요.”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관계. 그래야만 수현은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었다. 구원해 줄 것처럼 내밀었던 손이 제 목을 졸라도. “그래.” 그를 증오하는 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참아 봐. 어디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