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은 짐승답게 키울 생각이다.” 이상한 세계로 납치된 것도 모자라 권력가의 애완동물이 되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펫’이. 이곳은 동물 형상을 한 사람들의 세상. 그리고 내 주인은 거대한 흑표범 수인. 내가 그들처럼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들키면 살처분당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어릴 적 키우던 말티즈 흉내를 내서라도 주인을 속여야 했다. * * * “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시, 싫어. 넣지 마. “체온을 재는 것뿐이다. 착하지.” “읏.” 내 안으로 들어오는 체온계의 냉기를 느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울음소리를 흘리지 않게. 혹시라도 사람의 말소리를 내지 않게. 진짜 애완견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내 주인이 큼직한 손으로 나를 쓰다듬었다. “우리 미로, 참 예쁘구나.”
🌟 로판 소설 중 상위 11.92%
평균 이용자 수 6,521 명
* 100명이 선택하면 '명작' 칭호가 활성화 됩니다.
'명작'의 태양을 라이징 해보세요.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 작약이 만개하던 날. 성인이 된 가주, 카를이 6년 만에 귀환했다. 천사 같은 외모, 녹아내릴 듯 다정하고 맹목적인 태도. 그리고 피후견인이자 누이처럼 자란 제르미나를 좇는 농밀한 시선. 그러나 그녀가 꺼낸 약혼 이야기에 모든 것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약혼…… 말입니까?” 내려다보는 두 눈이 더 이상 웃고 있지 않다. “누구의?” 이것은 붉은 작약 저택에 두 번의 작약 철이 찾아오는 동안의 이야기다. *** 흐트러진 표정의 제르미나가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누님.” 어느새 카를이 얼굴 근처까지 성큼 다가왔다. 긴 손가락을 뻗어 잇자국이 난 아랫입술을 문지른다. “그러다 입술 상하십니다.” 얼얼하던 통증은 점막을 스치는 자리자리한 감각에 덮여 사라졌다. “물고 싶으시면, 제 것을 대신…….” 흠집 하나 없는 단단한 검지가 슬며시 벌어진 제르미나의 입술 사이를 비집었다. 그녀의 말랑한 혀를 끝에서부터 꾸욱 누르며 밀려 들어오는 손가락. 달고 자릿한 것이 입을 메운다. “흐으…….” 쿵쾅거리는 맥동에 맞춰 저릿하게 울리는 하복부에 제르미나가 신음했다. “누님께서 그런 얼굴을 하시면, 전…….” 자홍색 눈동자에 세찬 불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