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호텔에 왜 안 왔어요.” 빨개진 두 뺨, 흔들리는 눈망울. 이준은 티 없이 말간 여자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파르게 추락하는 집을 보면서, 가난에 허덕이면서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고작 순결이라는 건가. 앞으로도 절대 보이지 않을 것처럼 꽁꽁 싸매고 있을까. 계속, 그렇게 계속 지켜 낼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아니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밟히고 밟히다 죽을 것 같을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정신이 좀먹히는 그사이, 넌 언젠가는 내어 주게 될 테니까. “나랑 키스했잖아.” 이준은 휘청거리는 희서를 작정하며 부추겼다. 어차피 무너져 버릴 여자라면, 그녀 앞에 제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키스했으면 이미 반은 온 겁니다.” “.....”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살짝 벌어진 여자의 입술에서 잔호흡이 딸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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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겠네.” 세월이 흘러 더 멋있고 근사해진 남자는 오빠의 친구였다. 잊고 있었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유선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조차도 몰랐던 이 기이한 마음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제 회사로 들어오라는 그의 제안에 선뜻 응한 것도, 술친구 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것도, 즉흥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키스를 한 것도. 모두가 그를 품고 있었음에 저지른 행위들이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이기도 했다. “우려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염려 놓으세요.” “내가 무슨 우려를 했는데.” “저 임신 아닙니다.” 한때의 인연으로 얄팍하게 남겨 두었던 친근함마저도 모조리 사그라진 기분을 느끼면서. 유선은 뒤늦은 의문이 들었다. 그가 있는 이곳으로 온 제 선택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가 하는. * * * 싫어요. 안 해요. 못 해요. 발칙한 여자의 목소리는 늘 신경을 긁곤 했다. 그리고 태주는 늘 궁금했었다. 왜 너여야만 했는지. 그러한 의문은 이제 무의미했다. “나는 널 만나야겠어. 후에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더라도 나는 널 만날 거야.” 안 되는 수만 가지의 이유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네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하니까.” 찾아야겠다. 안아야겠다. 가져야겠다. 너 아니면 안 된다는 것. 그것만이 내 이유의 전부였으니.
수연은 도하를 한참 바라보았다. 격식이 있었고 우아한,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역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유난히 날이 맑아 눈이 부셨던 그날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의 중앙에서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마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불길한 예감은 그날도 잠시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나 좋아하잖아 너.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잖아. 나만 쫓아왔으면서.” “…….” “그러면서 싫은 척, 아닌 척. 가소로워. 넌 항상 나한테 다 들켰었지.” 그에게 있어 오수연이란 그저 잠자리 상대일 뿐이었다. 해서 떠나는 이유 따위는 필요가 없다. 관계 청산은 그 어떤 인연보다 깔끔하다. “오수연, 너는 참 쉬웠어.” 결심을 했다. 그에게서 영영 멀어지기를. * * * 도하는 수연의 눈동자를 오롯이 응시했다. 저 또렷한 동공은 다 내줄 것처럼 티 없이 맑다가도 만 갈래로 나뉜 길처럼 까마득했다. 오묘해서 신기했고, 그래서 더 궁금했다. 도하는 그녀의 눈을 내내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언제 알려줄 거야.” “뭘요……?” “네가 내 아이 가진 거.”
내 인생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질 그런 결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은 달라 보였다. “하자고, 결혼.” 순순히 내민 그 말이 단단하게 떨어졌다. 그가 이내 거리를 좁혀 앉았다. “나랑 볼 장 다 보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 “나랑 부부 행세를 하다가 네가 물러서야 할 때를 정하고 나가면 그만이다. 이 결혼을 그렇게 정의했다면 오산이야. 부부끼리 해야 하는 일은 성실하게 이행할 거야. 너도 그렇게 따라야 할 거고.” 와인잔을 잡은 손에서 경미한 떨림이 일었다. 끝내 떨어지려는 잔을 그가 조용히 잡았다. 커다란 손이 작은 손을 덮었다. “이 결혼 절대 못 물러.”
“너, 이름이 뭐야.” 내짓는 표정 하나하나가 가히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그에게 그대로 되갚아줬다. “보기에도 끔찍한 애, 이름 알아서 뭐 하시게요?”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것 같던 그를 다시 만난 날은, 27살의 겨울이었다. 상상도 못 했다. 그의 파트너가 될 줄은. 그의 육체를 가질수록 마음도 갖고 싶었다. “이제 오지 마.” 붉게 피어오르던 욕망은 단숨에 끊어졌다. “난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해요.” 후회했다. 그를 만난걸. 하지만 먼저 끝을 냈던 그가 감춰진 제 속내를 드러냈다.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든, 저주할 생각이든.” 단단히 잡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내 옆에서 해.”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그거 알아요?” 그가 말문을 열었을 때, 웃음기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내가 윤고은 없어지고 나서 세 번 찾았어요.” “절 왜 찾았는데요?”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뭘요?” 따릉- 질문과 동시에 자전거가 경적을 울리며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찰나에 태성이 그녀의 가는 팔을 잡아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밀착되듯 서로의 몸이 맞닿았다. 무감한 표정의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너.” “…….” “나 정말 좋아해?” 마주 선 거리는 가까웠고, 그 때문인지 그의 숨결과 목소리는 그녀의 귓가로 기민하게 전달됐다. 봄을 알리는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제 이름이 솔이거든요!” 도건은 잠자코 아이를 응시했다. 주변에 생동하는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그 순간 아이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칠흑같이 짙은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불현듯 과거의 잔상이 떠밀려왔다. 대학 신입 환영회 날, 평제 별장에서 종종 보았던 도우미 여자애가 제 후배가 됐던 날, 그 후배의 이름이 이윤주라는 걸 알았던 날, 제법 황당했던 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쑥날쑥했던 날. 그날. 눈이 마주친 여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하얗기만 할 줄 알았더니 빨개질 줄도 아는구나. 희한하고 신기하여 여자의 얼굴을 내리 바라보았던 것 같다. 맑고도 짙은 그 눈이 인상 깊었다. 충분한 반전이었다. 빨려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까맸던 눈동자. 닮았다. 도건은 여자의 눈을 똑같이 빼다 박은 아이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 * * “아저씨, 우리 친구예요?” 노란 병아리콩만 한 아이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도건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속으로 답했다. 아니. 우리는 친구가 아니야. 아저씨는 네 친구 하고 싶지 않아. 네 아빠 하고 싶은 거면 몰라도. 너 내 딸 할래? 그래, 솔이는 이 아저씨 딸 하면 되겠다. 그래서 아저씨는 네 엄마랑 결혼하면 되겠다.
악명 높기로 소문이 자자한 임원 중 하나가 신임 상무로 왔다. 기피해야 할 블랙리스트 임원들 중, 상위권에 속하는 자. 하루아침에 그자의 비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홍 비서가 잡은 겁니다. 내 발목, 홍 비서가 잡은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와 하룻밤을 보낸 사이일 줄. 본문 中 “내가 알던 사람이랑 많이 닮았어요.” 알던 사람? 뜬금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엉뚱한 말에 연희는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이름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 “해수.” 해준의 대답에 연희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부드럽게 누그러트렸다. 미소 띤 그녀의 웃음 속에 말간 청량함이 깃들었다. “신기하네요.” “…….” “제 딸 이름이랑 똑같아요.” 순간, 여유만만해 보였던 그의 낯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자칫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어리숙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결혼식 날, 눈앞에 둔 남편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여름의 태양만큼, 눈부신 그가 구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은희주 씨는 나에 대해서 단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그제야 알았다. 불온전한 이 결혼은 돌파구가 아닌 늪이었음을. *** 나직이 읊조리는 강준의 음성은 너무나 서늘했다. 강압적으로 느껴지다가도 잔잔한 선율처럼 부드러웠다. “나도 내가 이렇게 즉흥적인 놈인 줄 몰랐어요.” “…….” “희주 씨만 보면 떨려요.” 멀어졌던 그가 한 발 더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는 당신이 그리웠어요.” 흔들리고 비틀려서 더 뜨거웠던, 위험한 사랑 이야기.
“당신, 나랑 결혼하고 싶어?” 태준의 질문에 잠시 여운을 둔 윤서는 무감하게 답을 내놓았다. “……누구랑 하든 상관없어요.” “난 아니에요. 당신은 나랑 결혼해도 상관없을지 몰라도 난 아닙니다.” 감정이라곤 1도 없을 것 같은 무감각한 시선 처리, 웃음기 없는 메마른 얼굴을 마주 바라본 태준이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집 안에서 정해 줬다고 해도 명색이 인륜대사인데 결혼을 아무나와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매일 먹는 음식도 가리는 판에…….” “……내가 입맛에 안 맞는다는 말씀이시네요?” 태준은 꽤나 무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 뒤, 무언으로 일관했다. 그러길 잠시, 윤서가 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강태준 씨 입맛에 맞든 안 맞든.” “…….” “우린 곧 결혼하게 될 거예요.” 그랬던 그녀가……. "해 줄게요, 당신이 원하던 이혼." 이혼을 요구했다.
내가 울든, 남이 울든. 그 누가 됐든 질질 짜는 건 질색이었다. 태하는 제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지안을 가만 바라보았다. 울지 말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숨결이 맞붙은 거리에서, 태하는 다시금 지안을 응시했다. 네가 내게 들어온 순간, 널 울리고 싶었다.
어색하고 불편했던 동창이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올려다보기도 힘든 상사가 되어서. 그리고 미친 제안 하나를 했다. “난 지금 이 결혼이 필요해.” 그 말에 어이없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나한테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 좋게 놔버릴 거야.” 빌어먹을 그런 말에도. *** 숨이 파닥파닥 뛰었다. 살을 비비고 입술을 먹고 먹히는 상황이 익숙할 만한데 그러질 못 했다. 밀폐된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니 또 달랐다. 그리고 이건 연출된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은서야.” 순간 무거운 정적 사이로 수혁의 말이 비집고 들어섰다.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까. 계약 같은 거 다 집어치울까.” “끝내자는 말이니?” “너랑 자고 싶다는 말이야.” 입술이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혁이 자조 섞인 웃음을 내었다. “서은서.” 그가 조용히 물었다. “우리 연애 할까?”
수연은 도하를 한참 바라보았다. 격식이 있었고 우아한,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역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유난히 날이 맑아 눈이 부셨던 그날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의 중앙에서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마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불길한 예감은 그날도 잠시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나 좋아하잖아 너.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잖아. 나만 쫓아왔으면서.” “…….” “그러면서 싫은 척, 아닌 척. 가소로워. 넌 항상 나한테 다 들켰었지.” 그에게 있어 오수연이란 그저 잠자리 상대일 뿐이었다. 해서 떠나는 이유 따위는 필요가 없다. 관계 청산은 그 어떤 인연보다 깔끔하다. “오수연, 너는 참 쉬웠어.” 결심을 했다. 그에게서 영영 멀어지기를. * * * 도하는 수연의 눈동자를 오롯이 응시했다. 저 또렷한 동공은 다 내줄 것처럼 티 없이 맑다가도 만 갈래로 나뉜 길처럼 까마득했다. 오묘해서 신기했고, 그래서 더 궁금했다. 도하는 그녀의 눈을 내내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언제 알려줄 거야.” “뭘요……?” “네가 내 아이 가진 거.”
어리숙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결혼식 날, 눈앞에 둔 남편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여름의 태양만큼, 눈부신 그가 구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은희주 씨는 나에 대해서 단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다 알면 이렇게 나오면 안 되죠. 연락 한 통 없이, 얼굴 한 번 안 보이다가 결혼식 당일 나타난 미친놈한테 뺨이라도 한 대 때렸어야지.” “…….” “그런 주제에 당신한테 덤벼든 짐승 새끼, 입술이라도 물어뜯었어야지.” “…….” “나에 대해 다 안다면 말이에요.” 그제야 알았다. 불온전한 이 결혼은 돌파구가 아닌 늪이었음을. *** 나직이 읊조리는 강준의 음성은 너무나 서늘했다. 강압적으로 느껴지다가도 잔잔한 선율처럼 부드러웠다. “나도 내가 이렇게 즉흥적인 놈인 줄 몰랐어요.” “…….” “희주 씨만 보면 떨려요. 가슴이 숨차게 뛰다가도 까맣게 타버려요. 그래서 미친놈처럼 날뛰나 봐요. 나도 날 종잡을 수 없어요.” 멀어졌던 그가 한 발 더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는 당신이 그리웠어요.” 흔들리고 비틀려서 더 뜨거웠던, 위험한 사랑의 이야기.
내가 울든, 남이 울든. 그 누가 됐든 질질 짜는 건 질색이었다. 태하는 제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지안을 가만 바라보았다. 울지 말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울리고 싶었다. 더 크게 울리고 싶었다. 내 밑에 누워 울음을 터트리면 어떨까.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을 먹고 싶다. 쇄골까지 덮은 저 하얀 블라우스를 풀어 헤치고 싶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를 망치고 싶다. 끝내 물기에 젖은 입술을 머금었다. 혀끝을 적신 눈물이 달았다. 숨결이 맞붙은 거리에서, 태하는 다시금 지안을 응시했다. 네가 내게 들어온 순간, “더 가?” “.....” “더 갈래?” 널 울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