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에 젖은 냄새가 차 안에 아릿했다. “처음부터 착하게 굴었으면 안 젖었을 거잖아.” 나직하면서도 친밀한 어조가 또 다시 마음을 뭉클뭉클 떠오르게 했다. 지난밤, 지지난밤의 꿈들이 아찔하게 재생되었다. 연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거짓말 같은 감각들. “저요. 자꾸만 나쁜 꿈을 꿔요.” “나랑 같네.” “이사님도요?” “나쁜 꿈 퇴치법. 첫째, 잠을 안 잔다.” “그게 뭐예요. 순 엉터리다.” 말과 더불어 소르르 웃음이 기어 나와 다행이었다. 웃음의 분량만큼 마음도 말캉해졌다. “둘째는요?” “둘째는 말해주기가 곤란해.” “그러니까 더 듣고 싶다.” “둘째, 즐긴다.” 이마에 신열이 훅 올랐다.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었다. 무진의 눈길이 없는 데로. 아니, 어디로든 숨어들고 싶었다. 무진 외에는 누구의 눈길도 없는 데로. 연하는 뜨거워진 이마를 두 손에 파묻었다. 환각 같은 두통이 정수리에 꽂혔다. 차가 태풍 속으로 들어갔다.
🌟 로맨스 소설 중 상위 35.20%
평균 이용자 수 221 명
* 100명이 선택하면 '명작' 칭호가 활성화 됩니다.
'명작'의 태양을 라이징 해보세요.
〈강추!〉금지에 대해 그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먹먹해져 왔다. 이소는 컵을 기울여 물 위에 동동 뜬 얼음 하나를 입에 머금었다.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에서 바람이 마구 달려들 때처럼 입 안이 시렸다. 눈물을 머금은 눈은 금방 표시 나지만 입은 그렇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서, 내내 그렇게 참고 있는 거야?” 참는다는 표현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아릿해진 마음으로 눈물이라도 쏟게 될까 봐 이소는 애써 고운 웃음을 지었다. “참긴 누가요. 어차피 언젠가는 고쳤어야 하는 호칭이잖아요.” “어차피.” “결혼하면, 아이도 생길 거고, 그럼 그 아이가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잖…….” “그럼 이제부턴 뭐라고 부르려고?” 정말 알고 싶어 묻는 건지, 그냥 한 번 던져보는 말인지 알 수 없어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가 다시금 물어왔다. “안 부를 거야?” 낮은 음색 속에 스며 있는 간절함의 조각 하나가 이소에게 두근거림과 용기를 함께 주었다. 단지 착각에 불과하다 해도 상관없었다. “부를 거예요.” “어떻게?” “후인.” 웃음으로 말해놓고 이소는 두 손으로 얼른 이마부터 가렸다. 그의 눈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손 내려.” “꿀밤 안 줄 거죠?” “줄 거야.” “그럼 안 내릴래.” “지금 말고 나중에. 그러니까 내려.” “나중에,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콩 때리려고요?” “그래.” “눈사람.” “눈사람?” “네, 눈사람이요. 이제부턴 그렇게 부를 거예요.” “내가, 눈사람이야?” “설……인.” 이소는 그의 이름에서 ‘설’과 ‘인’만 또록또록 발음하고 가운데 글자 ‘후’를 숨으로 내쉬었다. 그러자 그도 이소처럼 똑같이 따라 했다. “설……인.” “그래서 눈사람이에요.” “남의 이름을 왜 네 멋대로 편집해?” “싫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늘 그러하듯 묵묵히 이소를 바라보았다. 이소는 웃으며 물었다. “세 번째구나?” “가만히 있거나?” 이소의 끄덕임에 그가 조용히 웃었다.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눈사람에게』.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결정으로 고모할머니의 비서를 따라 서울에 온 크림. 아무도 반겨 주지 않은 그 집에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유예 기간, 한 달. “오늘은, 나랑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요?” 떠나왔던 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고드름 나무 같은 그를 느껴 버렸다. 그 사람의 긴 그림자가 외로움으로 담겨 버렸다. “아저씨의 소확행은 뭐예요?” 도국, 그에게 닿고 싶었다. 연결되고 싶었다. “나중에도 기억할 것 같아요. 시나몬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 본 오늘, 이 순간을.” 이토록 다정한 봄날에 우리 시리고도 달콤한, 시나몬 아이스크림처럼.
누굴 미치게 하려고 작정을 했나. 전세금이 필요한 엄마를 위해 베이티시터 면접을 보러 가게 된 그린. 그곳에서 며칠 전 큐브를 만지던 자신에게 대뜸 큐브 중독이란 진단을 내렸던 이상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허리께까지 오는 긴 머리에 첫 만남부터 특이했던 그의 정체가 다름 아닌 고용주 정효라는 사실에 놀라고, 이어 자신이 돌볼 아이가 강아지라는 사실에 웃고 만다. 그날부터 강아지를 돌보기 위해 그의 집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그린은 흙으로 그릇을 빚으며 자신을 ‘사부님, 나의 사부님’이라 부르라는 정효가 점점 자신의 마음에 스미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잠깐 맛보기 “또 시작이야.” “뭘?” “반말 퍼레이드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들어가 할 일이나 하시지.” “할 일요?” “여기에 온 목적.” “그야, 베이티시터 면접을 보…….” “면접은 어제 봤는데.” “네?” “합격 여부는 똥강아지 다루는 거 봐서 결정하지.” “똥강아지요?” 아이를 똥강아지라고 칭하는 건 그렇다 치자. 어릴 때 엄마에게서 종종 들어 본 말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합격 여부를 왜 이 남자가 들먹이는지 모르겠다. 형님 집도 아니라면서 왜 나서는 거람? “참 내. 누가 누굴 합격시킨다는 거예요?” 툴툴거리는 그린에게로 남자의 말이 또렷이 다가들었다. “문정효가, 남그린을.”
〈강추!〉이나는 살그머니 문을 밀어 열었다. 커튼이 드리워져 적당히 어두운 방 안, 남자는 다리를 길게 뻗은 채 침대 헤드에 몸을 반쯤 기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새 잠이 든 건가? 이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침대 곁 협탁에다 죽 쟁반을 올려놓았다. 고개를 들이밀고 탐색이라도 하듯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감겨 있는 남자의 눈 대신 짙은 눈썹이 이나를 마주 보았다. 이나는 제풀에 움찔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생동감 있는 눈썹을 마주 대하니 어쩌면 잠든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침 식사를…….” 말이 채 끝맺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또렷이 긴장되는 느낌. 시선이 맞부딪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어렵다던 호준의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나는 듯했다. 눈 감고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도 앞에 선 사람을 잔뜩 긴장시키는 저 서늘한 기운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나는 궁금해졌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눕지. 이러고 어떻게 쉰담.” 이나의 가만한 중얼거림에 그가 눈을 떴다. 눈길이 마주쳤다. 마음이라든가 감정이라든가, 그러한 것들을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깊은 눈동자였다. 피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나가 먼저 눈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아침을 가져왔…….” 이나의 말은 중간에 잘렸다. “나가.”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비정한 명령의 어조. 그 어조가 이나의 가슴을 싸늘히 내리그었지만 주눅 들지 않으려고 이나는 굳이 대답을 했다. “네.” 그리곤 돌아서서 서너 걸음 걸어 나오던 이나는 흡, 숨을 멈추며 그 자리에 섰다. 우리말을 하네! 나가, 라는 그 명령은 분명 한국어였다. 이나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남자는 이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공허하고 차가웠다. 이나라는 한 인격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방 안에 구비된 가구들 중 하나를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게 떨리다가 툭 내려앉았다. 가슴속 떨림과 내려앉음을 애써 부인하며 이나는 꼭 한 걸음만 앞으로 떼어놓았다.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이끌림』.
〈강추!〉오랫동안 내가 모르게 나를 사랑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제 내게 걸어옵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내 마음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내 안의 그가 하염없이 깊어졌습니다. 오래도록 가만히 지켜만 보며 홀로 마음을 길러왔습니다. 그녀가 떠나던 날, 고이 간직해온 내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고통스런 부재의 세월을 지나 다시 그녀 앞에 섰습니다. 나를 보며 웃는 그녀……. 처음으로 뼈가 저리게 행복합니다. 악연도 감히 거스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김지운의 로맨스 중편 소설 『폭설』.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다른 말들은 다 필요 없어. 사랑이라면, 이 마음이 사랑이란 거라면, 사랑이라는 건 달콤하고 설레는 일만은 아니구나. 가슴을 찢어 내는 듯한 아픔과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망설임과 나날이 부피를 키워 가는 그리움과 안타까운 기다림과…….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함께 가지는 일이구나. ▶ 책 속에서 “유림.” “네……?” 불러만 놓고 그가 말이 없었으므로 궁금해진 유림은 얼굴을 조금씩 들어올렸다. 미소를 품은 그의 입술이 제일 먼저 유림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고 아득했다. “아까 나한테 솔직해져 보라고 했지?” 유림은 어쩔 줄을 모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솔직하게. 나는 김유림이 좀 덜 예뻤으면 좋겠어.” “아니, 뭐 그런. 어떻게……” “특히 그 입술.” “아…….” 어떡하지? 이 사람, 다시 다가오면 어떡하지? 저 눈빛, 저 입술, 저 표정, 그럴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내게로……. 유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 번이어도 좋고 두 번이어도 좋아. 지금은, 오늘은, 이 순간은, 다 잊을래.
〈강추!〉집에 가요. 그리고 싹 잊어버려요. 지금은 이렇게 서운한 듯 올려다보지만, 먼 훗날엔 당신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내쳐 준 것을, 당신이 내비치는 마음 한 자락 잡아채지 않고 놓아 버리는 것을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나말고 괜찮은 남자 만나서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으며 먼 훗날엔 나 같은 놈 따윈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거예요….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가을사랑 - 평강공주와 온달왕자』.
〈강추!〉“왜 날 오라고 했어요? 인터뷰 같은 거 안 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사람이, 굳이 날 지목해서 부른 이유가 뭐예요?” “사진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요.” 그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농담을 즐기시는군요.” “농담 아닌데?” “사진 잘 나온 거랑 인터뷰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잘 나온 게 아니라, 예쁘게 나왔다고 했어요.” “그래서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려구요. 실물이랑 대조해서. 정말 예쁜가, 아님 내가 사진을 너무 잘 찍은 건가.” 치아를 드러내며 그가 밝게 웃었다. 베란다를 넘어 들어온 햇빛이 그의 웃음처럼 환했다. 윤희는 부신 빛을 피하듯 시선을 그의 뒤편 벽으로 던졌다. 그에게서 번져 나오는 밝음이 어쩐지 두려웠다. 결코 경박하지 않은 그 밝음, 산란하는 빛을 닮은. “그래, 확인작업은 대충 끝났나요?” 윤희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요?” “아까 말했잖아요.” “무슨……?” “달팽이.” “예쁘단 소린 아니군요.” “그렇게……단단한 껍질로 꼭 감싸서 지켜야 할 게 대체 뭔가. 그게 궁금해지려는 중이에요.” 나직나직 흘러나오는 그 말들은 혼잣말 같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막막한 불안감이 윤희에게 다가들었다. 무언가……어둡거나 위협적인 느낌은 분명 아닌데, 마음을 휘젓는 두려움 혹은 불안. 그 정체를 명확히 알 수가 없어 더욱 그러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그가 명쾌한 목소리로 결론을 냈다. “예쁜 달팽이, 라고 해 두죠. 서윤희라는 여자.” 윤희도 지지 않고 받아 쳤다. “한가한 바람, 이라고 해 둘게요. 이연우라는 남자.” 씩 웃는 그의 표정에 악동의 그림자가 비쳤다. 비밀스러운 어떤 일을 모의하듯 그가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시작한 거네?” “인터뷰 말이에요?” 그 소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윤희는 그렇게 받아 되물었다. “아니, 여자와 남자. 서로서로 그렇게 바라봤으니까 시작한 거란 얘기.”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햇빛 아래 그가 있다』.
〈강추!〉운동장을 울타리처럼 둘러싼 나무들을 그윽한 눈으로 하나하나 올려다보던 그녀가 얼마 동안 잠잠히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몸이 얼고, 다 얼어터진 후에야 비로소 바람을, 나무가 가지를 휘어 안고, 등을 쓸어내린다.” 진우는 서은을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진우의 시선과 부딪치자 서은이 부끄러운 듯 가만히 미소 지었다. 마치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서 볼이 빨개진 여자아이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야, 그건. 추억을 이끌어내는 암호?” 서은이 고개를 저었다. “시예요.” “시?” “네. 이성목의 시.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이에요.” “흠. 시를 암송하신다? 제법 국문학도 티가 나는 걸?” “제목을 물어봐 주세요.” 서은이 스무고개라도 하듯 요청했다. “좋아. 제목이 뭐지?” “나무가 바람을 만나는 시간.” 나무가……바람을 만나는 시간. 진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제목만으로도 미묘한 울림이 있었다. “계속해요?” 서은이 물었다. “계속해 봐.” 진우가 대답했다. “아픈 데 없느냐. 내가 널 잊었겠느냐.” 그리고 서은은 잠깐 주춤했다. 눈 속에 아득하게 안개가 서린 것 같았다. 곧 그녀의 목소리가 하늘하늘 새어 나왔다. “바람이, 제 품에서 우는 것을, 늙은 나무는, 뼈를 뚝뚝 꺾어내며, 보여주려 하지만, 나무는 모른다. 바람은 제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울음이 없다는 것을. 끝내는, 나무의 뼈마디 으스러지는 소리만, 마을까지 내려와, 아궁이 군불 삭정이 같은 것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곤 하는 것이다.” 아늑한 침묵이 진우와 서은 주변을 감돌았다. 시에서 번지는 기운이 마음을 스윽 베는 것도 같고, 그 베인 상처를 따뜻이 어루만져주는 것도 같았다. 진우는 서은이 품어 안은 침묵을 차마 깨뜨리지 못하고 기다렸다. “나는요. 2연이 제일 아파요.” “…….” “아픈 데 없느냐. 내가 널 잊었겠느냐……. 이 부분.” 막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서은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우는 가슴 가운데 일기 시작한 물결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다시 조금 더 기다린 연후에 서은을 돌아보니, 맑은 눈동자에 이슬과 웃음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 눈으로 서은은 뿌스스 웃어 보였다. “집에 가요, 아저씨. 배고프다.” 진우도 웃었다. 소리 없이, 마음을 허물어뜨리며, 그녀에게.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오르골』.
〈강추!〉태양을 닮은 남자, 태하 바다를 닮은 남자, 인하 그리고 서로 다른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자, 여진 세 사람에게 드리워진 애절한 운명의 3중주!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올 오아 낫씽 (All or Nothing』 제 1권.
“과거의 인기작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 “2007년의 인기 로맨스 소설, 김지운 님의 〈풀잎연가〉를 이제 신영미디어 전자책으로 만나 보세요.” 풀잎 향기가 나는 그녀에게 바치는 연가 아내의 외도로 이혼한 후 여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하진. 그러나 단단하게 굳어 버린 그의 마음을 파고든 한 여자가 있었다. 바로 밝고 순수한 동시에 깊은 사랑의 상처를 가진 그녀 서이린. 하진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린 곁에서 영원히 머물며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걸 느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상처는 오히려 독이 되어 그의 사랑까지 힘겹게 만드는데….
〈강추!〉매일 밤 12시는 준희에게 그가 허용되는 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든 시간. 준희는 마치 꿈처럼 시작되는 한 세계의 열림을 보고 있었다. 아득한 절벽 위에서 외줄을 타듯 위태롭지만 또한 향기로운 느낌으로. 두렵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 사랑도, 당연하지 않은 삶의 방식도, 당연하지 않은 시간들도. 한 여자가 가슴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느 밤, 비가 거칠게 쏟아져 내리던 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서 그녀는 내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비에 흠뻑 젖은 그녀의 두 발이 안타까웠다. 그 밤이 지나고도 그녀는 내내 나를 맴돌며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바라봄의 의미를 알았지만 그뿐, 내가 다가갈 수는 없었다. 다시 비가 쏟아지던 날, 비를 맞으며 내게로 온 그녀. 내 손바닥 위에 이름을, 마음을 그려 넣으며 미소 짓던 그녀. 그래서 그 여자는 내게 기억이 되었다. 기억……버릴 수 없는.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약속』.
눈사람에게 지독한 슬픔이 또 다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가슴을 저미는 슬픔인 줄만 알았는데, 돌아보면 그 일이 어느새 찬란한 기쁨의 시초가 되어 있는 거예요. 내내 그런 일들의 연속인 것 같아요.” 어느 날 세상에 하나뿐이었던 엄마를 잃은 열 살 소녀에게 눈사람 같은 남자가 찾아온다. 엄마의 이복 남매들이 그녀를 맡지 않겠다고 서로 싸울 때, 어린 그녀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던 그. 세월이 흘러, 이제 그는 그녀에게 또 다른 이름으로 다가오는데……. 살랑이는 바람같이 그녀의 곁에 머물며 어느새 그녀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서른다섯의 그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리게 하는 스무 살 그녀의 안개꽃처럼 잔잔한 사랑 이야기. 동그라미 나처럼 예쁘게 웃는 사람 처음 봐요? 어릴 적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음악만을 위해 살아온 바이올리니스트 윤미도. 그 덕에 성공한 음악가로 자리를 잡긴 했지만, 자신의 인생에 끊임없이 간섭하는 모친에게 지쳐 버린 그는 다친 손을 핑계삼아 잠시 요양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때마침 지인에게 추천받은 시골의 숙소. 마침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망설임 없이 집을 떠난 그는 초행길인 탓인지 그만 한참이나 길을 헤매고 만다. 그러던 중, 인적이 드문 버스 정류장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 미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동그랗게 풍선껌을 터트리며 천진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왠지 모를 호기심을 품게 되는데…. 약속 스물셋에 나는 여자가 되었다…. 비 오는 여름밤, 닫은 구멍가게 대신 찾아간 편의점에서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운 손을 가진 남자를 만난 준희. 그날 이후,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해 편의점을 매일같이 찾아갔지만 좀처럼 그와 다시 마주칠 수 없었다. 하지만 며칠 뒤, 거짓말처럼 그 남자와 재회했다. 그에 기뻐하며 말을 걸어 보려 하던 그녀는 이내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에 빠지고 만다. 하여 괴로운 사랑이 되기 전에 그를 포기하려 하지만 그가 빗속에 홀로 서 있던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준 그 순간, 준희는 더 이상 마음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안류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 마. 절대로.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요양원에 들어가신 이모를 대신하여 펜션을 운영하는 은유. 청아한 바다가 보이는 펜션에서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4년 전에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비밀을 품은 채 사라졌던 연인, 수안이 그녀의 앞에 돌아왔다. 그와의 재회는 은유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지만, 그녀는 말없이 종적을 감추었던 그로 인한 상처를 숨기기 위해 그와 애써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수안은 과거의 일을 상기시키며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파헤치려 하는데….
겨울 사랑 上 2달, 당신을 2달 동안만 사랑하겠어. “나랑 살게 되면.” 그런 말 하는 당신, 어쩌려고 그래요. 나 정말 그런 욕심 생기면 어쩌려고. 당신에게 그런 욕심 품게 되면 나 정말 나쁜 여잔데. 거기까지 욕심 품으면 지금 이 행복도 빼앗길 것 같은데. 그래서 불안해지는데. 어쩌려고 당신 그렇게 말해요. 나, 당신한테 그만한 가치 지닐 수 없는 여잔데. 당신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나, 슬픔 같은 거 모르고 살았을까. 마냥 행복만 하고 살았을까. 당신, 조금만 더 일찍 내게로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 책 속에서 “내 반쪽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잘 봐 둬야지. 다음 생에선 좀 더 빨리 잘 찾을 수 있게. 헤매지 않게.” “다음 생에선?” 그가 되묻는데 울컥 가슴이 아팠다. 다음 생. 자기가 말해 놓고도 그 말이 얼마나 슬픈 빛깔인지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그가 다시 입에 올리니 그대로 아픔이고 눈물이었다. 통증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정임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 생에서도 물론 지금처럼 우리 함께일 거야. 그런데 당신,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둘 만나기까지 내가 한눈에 당신 알아보고 찾아갈 테니까. 이 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 다음 생에서도, 또 다음 생에서도 우린 금방 알아볼 수 있어. 다른 얼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알겠어?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안 하는 게 좋아. 당신은 지금 이 생에서 내게 충실하면 돼. 지금 이 생에서 우리 사랑에만 충실하면 돼. 도망갈 생각 하지 말고, 한계 같은 것도 그어 두지 말고. 그래야 착한 당신이야. 그래야 예쁜 당신이야.” “네, 선생님.” 정임은 짐짓 명랑하게 대답했다. 소녀처럼, 여학생처럼, 남자를 처음 사랑하는 여자처럼. 겨울 사랑 下 아파서 아파서…… 그래서 사랑인가 보다. 기다려, 당신. 내가 데리러 갈게.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절망은 하지 마. 다 괜찮아. 당신만 무사하다면 나는 다 괜찮아. 당신 몸, 당신 마음,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지만 않고 무사하다면. 어떤 일이 있었대도 괜찮아. 당신만 내게 오면 돼. 당신만 돌아오면 돼. 그러면 나, 다시는 당신 손 놓지 않을게. 다시는 당신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거기가 어디든 가만히, 기다려. 기다려 정임아. 정임아……. ▶ 책 속에서 “당신은 내게 겨울 사랑이에요.” 나지막하게 정임이 말했다. “겨울…… 사랑?:” “그 시, 생각나요?” “아, 고정희? 당신이 좋아하는?” “응. 그 시 겨울 사랑을 읽으며 삶을 견디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필요 없게 됐지만.” 정임은 눈을 들어 이현의 눈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있으니까.” “내가 겨울이야? 나처럼 따뜻한 사람이? 어째서 그렇지?” “당신 사랑은 세상 끝날까지 한결같을 거니까. 결코 변질되는 일 없이 늘 그대로. 당신 사랑은 늘 같은 계절이에요. 그 중에서도 가장 보존성이 높은 계절, 겨울. 부패할 걱정 따윈 절대 없어요. 당신 마음은, 당신 사랑은, 그래서 언제나 겨울이에요. 겨울 사랑이에요. 한 겹 안은 늘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여름 사랑 - 반하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다른 말들은 다 필요 없어. 사랑이라면, 이 마음이 사랑이란 거라면, 사랑이라는 건 달콤하고 설레는 일만은 아니구나. 가슴을 찢어 내는 듯한 아픔과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망설임과 나날이 부피를 키워 가는 그리움과 안타까운 기다림과…….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함께 가지는 일이구나. ▶ 책 속에서 "유림." "네……?" 불러만 놓고 그가 말이 없었으므로 궁금해진 유림은 얼굴을 조금씩 들어올렸다. 미소를 품은 그의 입술이 제일 먼저 유림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고 아득했다. "아까 나한테 솔직해져 보라고 했지?" 유림은 어쩔 줄을 모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솔직하게. 나는 김유림이 좀 덜 예뻤으면 좋겠어." "아니, 뭐 그런. 어떻게……" "특히 그 입술." "아……." 어떡하지? 이 사람, 다시 다가오면 어떡하지? 저 눈빛, 저 입술, 저 표정, 그럴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내게로……. 유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 번이어도 좋고 두 번이어도 좋아. 지금은, 오늘은, 이 순간은, 다 잊을래. 봄 사랑 - 꽃을 보듯 너한테 내 마음을 어떻게 보이니? 그런 기대는 하지도 마. 네가 바라는 선물이 그런 거라면 난 못 줘. 절대로. 네가 나한테 귀여운 동생이 아니라 남자라도 그런 마음 못 꺼내. 너를 좋아해. 그런데 꼭 거기까지만 할래. 보면 기분 좋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까지 한데…… 그 이상은 아니야. 내게로 오는 마음 가로막고, 네게로 가는 마음 동여매고, 그래야 하는 때도 있는 거야. ▶ 책 속에서 "오늘 많이 바빴어요?" "특별히 그렇진 않았어." "힘들어 보이네. 내 말대로 오늘은 지금 문 닫고 들어가요. 손님도 없는데 굳이 자정까지 버티고 있을 거 뭐 있어.?? "집에 들어가 봐야 혼잔데 뭐." 혼자라는 말이 은재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그러니까 얼른……." 결혼하면 좋잖아요. "얼른 뭐?" 은재는 밥만 우걱우걱 떠 넣었다. 결혼이란 낱말을 직접적으로 꺼내 버리면 수정이 저만큼 물러서 버릴 게 뻔해서였다. 가족이라든가, 아빠라든가 하는 말들로 결혼에 대한 마음을 내비쳤음에도 수정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늘 그 자리였다. "만약에 내가, 수정 씨보다 몇 살은 더 위고 가진 것도 아주 많은 남자였다면, 그러면 수정 씨 오래 생각 안 하겠지?" 봄 사랑 외전. 채리 & 다니엘 슬픔이 사라질 만큼 달콤한 그 남자의 입맞춤. 울고 있는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 다니엘. 다른 남자로 인해 울고 있는 자신을 안아 줄 만큼 다정한 남자였지만, 채린의 마음에 가득한 상처는 그를 밀어내게 만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행지에서의 만남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 채린의 마음속 깊이 간직된 실연의 아픔을 다니엘은 과연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까? ▶잠깐 맛보기 “만일…….” 나도 그때 아이를 낳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 아빠 마음도 그렇게 누그러졌을까? 은재도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었을까? 사랑스런 아이를 낳았더라면. “음?” 돌아보며 묻는 다니엘의 눈빛이 너무도 따스해서 채리는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채리…….” 이름을 부르고도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다니엘에게 채리는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말했다. “초콜릿이 필요해, 지금.” 가방을 열어 초콜릿을 꺼내 주는 대신 다니엘은 그의 입술을 주었다. 뺨을 부드럽게 감싼 채 채리의 입술로 내려온 입술은 그윽하고 깊고 나른했다. 그가 먹여 주던 초콜릿처럼. 채리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다니엘의 손을 적셨다. 그 눈물을 어루만지며 다니엘은 오래오래 채리의 입술에 머물렀다. 초콜릿을 대신해 다가온 그의 키스는 상자 속에 남아 있는 초콜릿 모두를 합친 분량 만큼이어서, 입술과 혀로 음미하는 동안 슬픔이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가을 사랑 먼 훗날엔 나 같은 놈 따윈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거예요… 집에 가요. 그리고 싹 잊어버려요. 지금은 이렇게 서운한 듯 올려다보지만, 먼 훗날엔 당신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내쳐 준 것을, 당신이 내비치는 마음 한 자락 잡아채지 않고 놓아 버리는 것을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나말고 괜찮은 남자 만나서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으며 먼 훗날엔 나 같은 놈 따윈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거예요…. ▶잠깐 맛보기 「끌어 내기 전에 나가」 수임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러다 입술에 피멍 들지 싶어서 윤은 애가 탔다. 하지만 그럴수록 윤은 냉담해졌다. 수임의 팔을 붙잡고 입구 쪽으로 끌었다. 힘없이 끌려오는 수임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문 밖으로 수임을 데리고 나온 윤은 명령하듯 내뱉었다. 「다신 오지 마. 그리고 여기, 번듯해 보여도 댁 같은 사람 드나들기엔 위험한 데야. 알아요?」 「기다릴게요. 일 끝날 때까지. 그럼 되죠?」 뭐? 기다린다고? 나를?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제정신 아닌 것 같아요」 수임이 다소 결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 제정신 아닌 거 맞아요.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자꾸만, 자꾸만……. 여기가 아프잖아.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걸. 그래서 그러는걸」 이끌림(개정판) 그리움과 복수심으로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두드리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전공 악기인 피아노까지 팔게 된 강이나. 하루하루를 살아 내기에도 벅찼던 그녀는 우연히 다시 만난 친구 호준을 통해 운 좋게 고액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건 바로 호준의 보스, 류타가 한국에서 머물 집을 관리하는 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오만함을 지닌 류타를 보며 이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먹먹한 안쓰러움을 느끼고 용기를 내어 다가가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데…. ▶잠깐 맛보기 “빚이 있지? 얼마야.” 이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지극히 건조한 표정으로, 얼마쯤 기계적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어조는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 있다. 이나는 말을 돌렸다. “찌개 어때요, 맛있죠?” 그러나 그는 봉투를 꺼내 이나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 정도면 될지 모르겠군. 더 필요하면 말해.” “……갑자기 왜 그래요.” “돈 필요하잖아, 너.” “필요 없어요.” “없던 자존심이 갑자기 생긴 모양이지? 줄 때 받아. 고맙다는 말 같은 건 나도 필요 없어.” 이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작정하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그에게로 마음이 가 있는 그만큼, 서운하고 아프다. 이나는 봉투를 집었다. “준다니까 받죠. 그런데 난 그냥은 싫거든요. 1년 치 월급도 선불로 받았고, 뭘 드려야 할까요? 가진 건 몸뚱이뿐이니까 몸을 드려야 할까요?” 그가 탁 소리를 내며 수저를 놓았다. 차갑게 굳은 얼굴이다. 서러움에 떠밀려 이나는 집을 나왔다.
겨울 사랑 上 2달, 당신을 2달 동안만 사랑하겠어. “나랑 살게 되면.” 그런 말 하는 당신, 어쩌려고 그래요. 나 정말 그런 욕심 생기면 어쩌려고. 당신에게 그런 욕심 품게 되면 나 정말 나쁜 여잔데. 거기까지 욕심 품으면 지금 이 행복도 빼앗길 것 같은데. 그래서 불안해지는데. 어쩌려고 당신 그렇게 말해요. 나, 당신한테 그만한 가치 지닐 수 없는 여잔데. 당신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나, 슬픔 같은 거 모르고 살았을까. 마냥 행복만 하고 살았을까. 당신, 조금만 더 일찍 내게로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 책 속에서 “내 반쪽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잘 봐 둬야지. 다음 생에선 좀 더 빨리 잘 찾을 수 있게. 헤매지 않게.” “다음 생에선?” 그가 되묻는데 울컥 가슴이 아팠다. 다음 생. 자기가 말해 놓고도 그 말이 얼마나 슬픈 빛깔인지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그가 다시 입에 올리니 그대로 아픔이고 눈물이었다. 통증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정임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 생에서도 물론 지금처럼 우리 함께일 거야. 그런데 당신,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둘 만나기까지 내가 한눈에 당신 알아보고 찾아갈 테니까. 이 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그 다음 생에서도, 또 다음 생에서도 우린 금방 알아볼 수 있어. 다른 얼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알겠어?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안 하는 게 좋아. 당신은 지금 이 생에서 내게 충실하면 돼. 지금 이 생에서 우리 사랑에만 충실하면 돼. 도망갈 생각 하지 말고, 한계 같은 것도 그어 두지 말고. 그래야 착한 당신이야. 그래야 예쁜 당신이야.” “네, 선생님.” 정임은 짐짓 명랑하게 대답했다. 소녀처럼, 여학생처럼, 남자를 처음 사랑하는 여자처럼. 겨울 사랑 下 아파서 아파서…… 그래서 사랑인가 보다. 기다려, 당신. 내가 데리러 갈게.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절망은 하지 마. 다 괜찮아. 당신만 무사하다면 나는 다 괜찮아. 당신 몸, 당신 마음,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지만 않고 무사하다면. 어떤 일이 있었대도 괜찮아. 당신만 내게 오면 돼. 당신만 돌아오면 돼. 그러면 나, 다시는 당신 손 놓지 않을게. 다시는 당신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거기가 어디든 가만히, 기다려. 기다려 정임아. 정임아……. ▶ 책 속에서 “당신은 내게 겨울 사랑이에요.” 나지막하게 정임이 말했다. “겨울…… 사랑?:” “그 시, 생각나요?” “아, 고정희? 당신이 좋아하는?” “응. 그 시 겨울 사랑을 읽으며 삶을 견디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필요 없게 됐지만.” 정임은 눈을 들어 이현의 눈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있으니까.” “내가 겨울이야? 나처럼 따뜻한 사람이? 어째서 그렇지?” “당신 사랑은 세상 끝날까지 한결같을 거니까. 결코 변질되는 일 없이 늘 그대로. 당신 사랑은 늘 같은 계절이에요. 그 중에서도 가장 보존성이 높은 계절, 겨울. 부패할 걱정 따윈 절대 없어요. 당신 마음은, 당신 사랑은, 그래서 언제나 겨울이에요. 겨울 사랑이에요. 한 겹 안은 늘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여름 사랑 - 반하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다른 말들은 다 필요 없어. 사랑이라면, 이 마음이 사랑이란 거라면, 사랑이라는 건 달콤하고 설레는 일만은 아니구나. 가슴을 찢어 내는 듯한 아픔과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망설임과 나날이 부피를 키워 가는 그리움과 안타까운 기다림과…….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함께 가지는 일이구나. ▶ 책 속에서 "유림." "네……?" 불러만 놓고 그가 말이 없었으므로 궁금해진 유림은 얼굴을 조금씩 들어올렸다. 미소를 품은 그의 입술이 제일 먼저 유림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고 아득했다. "아까 나한테 솔직해져 보라고 했지?" 유림은 어쩔 줄을 모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솔직하게. 나는 김유림이 좀 덜 예뻤으면 좋겠어." "아니, 뭐 그런. 어떻게……" "특히 그 입술." "아……." 어떡하지? 이 사람, 다시 다가오면 어떡하지? 저 눈빛, 저 입술, 저 표정, 그럴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내게로……. 유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한 번이어도 좋고 두 번이어도 좋아. 지금은, 오늘은, 이 순간은, 다 잊을래. 봄 사랑 - 꽃을 보듯 너한테 내 마음을 어떻게 보이니? 그런 기대는 하지도 마. 네가 바라는 선물이 그런 거라면 난 못 줘. 절대로. 네가 나한테 귀여운 동생이 아니라 남자라도 그런 마음 못 꺼내. 너를 좋아해. 그런데 꼭 거기까지만 할래. 보면 기분 좋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까지 한데…… 그 이상은 아니야. 내게로 오는 마음 가로막고, 네게로 가는 마음 동여매고, 그래야 하는 때도 있는 거야. ▶ 책 속에서 "오늘 많이 바빴어요?" "특별히 그렇진 않았어." "힘들어 보이네. 내 말대로 오늘은 지금 문 닫고 들어가요. 손님도 없는데 굳이 자정까지 버티고 있을 거 뭐 있어.?? "집에 들어가 봐야 혼잔데 뭐." 혼자라는 말이 은재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그러니까 얼른……." 결혼하면 좋잖아요. "얼른 뭐?" 은재는 밥만 우걱우걱 떠 넣었다. 결혼이란 낱말을 직접적으로 꺼내 버리면 수정이 저만큼 물러서 버릴 게 뻔해서였다. 가족이라든가, 아빠라든가 하는 말들로 결혼에 대한 마음을 내비쳤음에도 수정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늘 그 자리였다. "만약에 내가, 수정 씨보다 몇 살은 더 위고 가진 것도 아주 많은 남자였다면, 그러면 수정 씨 오래 생각 안 하겠지?" 봄 사랑 외전. 채리 & 다니엘 슬픔이 사라질 만큼 달콤한 그 남자의 입맞춤. 울고 있는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 다니엘. 다른 남자로 인해 울고 있는 자신을 안아 줄 만큼 다정한 남자였지만, 채린의 마음에 가득한 상처는 그를 밀어내게 만들었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행지에서의 만남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 채린의 마음속 깊이 간직된 실연의 아픔을 다니엘은 과연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까? ▶잠깐 맛보기 “만일…….” 나도 그때 아이를 낳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 아빠 마음도 그렇게 누그러졌을까? 은재도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었을까? 사랑스런 아이를 낳았더라면. “음?” 돌아보며 묻는 다니엘의 눈빛이 너무도 따스해서 채리는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채리…….” 이름을 부르고도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다니엘에게 채리는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말했다. “초콜릿이 필요해, 지금.” 가방을 열어 초콜릿을 꺼내 주는 대신 다니엘은 그의 입술을 주었다. 뺨을 부드럽게 감싼 채 채리의 입술로 내려온 입술은 그윽하고 깊고 나른했다. 그가 먹여 주던 초콜릿처럼. 채리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다니엘의 손을 적셨다. 그 눈물을 어루만지며 다니엘은 오래오래 채리의 입술에 머물렀다. 초콜릿을 대신해 다가온 그의 키스는 상자 속에 남아 있는 초콜릿 모두를 합친 분량 만큼이어서, 입술과 혀로 음미하는 동안 슬픔이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가을 사랑 먼 훗날엔 나 같은 놈 따윈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거예요… 집에 가요. 그리고 싹 잊어버려요. 지금은 이렇게 서운한 듯 올려다보지만, 먼 훗날엔 당신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내쳐 준 것을, 당신이 내비치는 마음 한 자락 잡아채지 않고 놓아 버리는 것을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나말고 괜찮은 남자 만나서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으며 먼 훗날엔 나 같은 놈 따윈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거예요…. ▶잠깐 맛보기 「끌어 내기 전에 나가」 수임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러다 입술에 피멍 들지 싶어서 윤은 애가 탔다. 하지만 그럴수록 윤은 냉담해졌다. 수임의 팔을 붙잡고 입구 쪽으로 끌었다. 힘없이 끌려오는 수임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문 밖으로 수임을 데리고 나온 윤은 명령하듯 내뱉었다. 「다신 오지 마. 그리고 여기, 번듯해 보여도 댁 같은 사람 드나들기엔 위험한 데야. 알아요?」 「기다릴게요. 일 끝날 때까지. 그럼 되죠?」 뭐? 기다린다고? 나를?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제정신 아닌 것 같아요」 수임이 다소 결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 제정신 아닌 거 맞아요.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자꾸만, 자꾸만……. 여기가 아프잖아.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걸. 그래서 그러는걸」
"내게는 당신이 나무인걸요. 오랜 세월 변함없이 나를 지켜온 나무. 내 곁에 서서 사랑으로 나를 키워온 나무. 내가 죽는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당신, 나무 같은 사람. 당신은…… 내 가슴속에 깊게 뿌리를 내린 한 그루의 나무예요. 너무도 소중한…… 내 마음의 나무.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연지』."
발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처음엔 그의 손길로, 다음엔 톡톡한 담요로. 내 두 발이 칭칭 감싸였다. “수안 오빠.” 그가 내 발 아래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나, 잠들었었나 봐.” “음.” “그런데, 발을 왜 이렇게 해놓은 거야?” 무의식 속에서 편안히 걸어 나온 반말 때문일까. 그가 나를 지그시 들여다본다. “따뜻하라고?” “그래.” “내 신발은?” “벗어던졌어.” “내가?” “……잠결에.” “잠결……에?” 말없이 나를 지켜보는 눈. 그의 두 눈을 마주 들여다보고 있으니, 불현듯 어떤 조각들이 반짝거린다. 한밤, 맨발로 차가운 땅을 디디며 정처 없이 헤매 다니는 나. 악몽에서 깨어나 돌아오면, 온통 시리고 아프던 발과 몸. 그 때 지금처럼 이렇게 지키듯 내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었지. “괜찮아.” 모래투성이의 두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시리지 않게 폭신한 양말을 신겨주고, 침대에 가지런히 눕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 덮어주면서, 다시 한 번. “괜찮아.” 아슴푸레한 기억이 현실과 겹쳐지며 목으로 울컥 울음이 차오른다. “수안 오빠. 언젠가, 나, 이런 적, 있었던 것 같아.” 그러나 꿈결이라기엔 너무도 선연한 그 정경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도 지금처럼, 수안 오빠가 나를, 이렇게 지켜보…….” “그런 적 없어.” 그의 목소리는 단호함을 넘어서서 꾸짖듯 호되다. 그는 눈길조차 내게서 떼어내 버렸다. 매몰차게. “있어, 있었…….” 급발진. 내 말을 삼키고서 차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나를 데리고 으르렁거리듯 앞으로 달려가는 차. 점점 흐려지는 억새밭, 바다, 그리고 하늘. 나는 그가 덮어준 담요를 얼굴로 바짝 끌어올렸다.
〈강추!〉강은 미요의 턱을 치켜들었다. 미요의 눈빛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강을 또렷이 쳐다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불꽃처럼 맞붙었다. “내가, 관심 가져주길 바라?” 낮고 서늘한 강의 음성이 동굴 저 너머까지 깊숙이 울렸다. 잠시 버티던 미요가 입술을 열었다. “바란 적 없어요.” “거짓말하지 마.” 말은 차갑게 내려치는데, 몸속은 열기로 들끓었다. 몸의 가장 중심으로 모든 피가 몰렸다. “거짓말…… 안 해.” “하고 있잖아, 지금.” “아니야.” “맞아.” 흔들림 없이 강을 쳐다보던 미요의 두 눈에 촉촉한 그늘이 어렸다. 강이 처음 이름을 말해주던 때 그러했듯이.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은데도 그래지지가 않는다. 피, 때문이다. 이미 뜨겁게 달구어진 피. “나를…… 원해?” 미요는 그늘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말해. 말해봐.” “만일, 원한다면요?” “그렇게 말고, 제대로.” 촉촉한 응시를 유지하던 미요가 단단히 끊어 말했다. “원한 적, 없어.” “거짓말하지 말랬어.” “당신이야말로.” 미요의 입술이 움직이는 매 순간 순간마다, 강의 피가 미쳐 날뛰었다. 날뛰는 피를 억누르려 강은 미요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얼굴이 뒤로 약간 젖혀져 내려 깔린 미요의 속눈썹이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을 비스듬히 쏘아보며 미요가 속삭였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강은 미요의 입술로 입술을 내렸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으므로 미요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졌다. 숨결은 강에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당신이야. 나를 원하는 것도, 지금 내 입술을 갖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것도. 강…… 당신.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타임』.
〈강추!〉너한테 내 마음을 어떻게 보이니? 그런 기대는 하지도 마. 네가 바라는 선물이 그런 거라면 난 못 줘. 절대로. 네가 나한테 귀여운 동생이 아니라 남자라도 그런 마음 못 꺼내. 너를 좋아해. 그런데 꼭 거기까지만 할래. 보면 기분 좋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까지 한데…… 그 이상은 아니야. 내게로 오는 마음 가로막고, 네게로 가는 마음 동여매고, 그래야 하는 때도 있는 거야.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봄사랑 - 꽃을 보듯』.
〈강추!〉“사실은 아까부터 내내 연습했는데, 잘 안 돼요.” “뭐가.” “이름요.” “누구 이름.” “이……레도.” 가슴 안에 예리한 아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레도는 무심히 물었다. “왜.” “잘, 모르겠어요. 어떤 느낌인지.” “느낌?” “가슴에 담기는 느낌 같은 거요. 그게 분명해야 거기 어울리는 글씨체로 쓸 수가 있는데, 레도 오빤 잘 모르겠어요. 어떤 느낌인지, 어떤…… 사람인지.” 마음의 결들이 올올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을 꽁꽁 묶으며 레도는 차갑게 말했다. “알려고 하지 마.”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느낌』.
"“묻지 않는 말엔 대답하지 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 식의 말투, 거슬려. 하지 마.” “…….” “대답해.” “……네.” “커피.” 민은 정원의 잔에 커피를 더 따랐다. 정원이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민은 좀 떨렸다. “옷이, 그것밖에 없나?” 뜬금없는 질문이어서 민은 정원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답.” “아, 저기, 아니요.”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있습니, 아니, 있는데요.” “지루해. 다른 걸로 입어봐.” 민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셔츠와 까만 스커트. 디자인도 특별할 것 없이 엇비슷한, 그러니까 가회동에서 주로 입어오던 옷들이었다. 홍 여사는 집에서 부리는 고용인들에게 이러한 스타일의 획일을 원했고, 민도 어느새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대답 안 해?” “네.” 가져온 옷들 대다수가 지금 입고 있는 스타일이었다. 굳이 찾아 입으려면 다른 색깔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원이 옷 같은 것에까지 터치를 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얼핏 사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극히 사적인 이 개입에 대해서. 기쁨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르고, 당혹감이라고 해야 할까. “대답만 하고 그대로 앉아 있는 건 무슨 태도야?” “네?” “내가 뭐라고 했지?” 민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정원이 내린 지시는……. 그래, 옷을 다른 것으로 입으란 거였다.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셨어요.” “알아들었으면 일어나.” “지, 지금요?” 정원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곤 민을 쳐다보았다. 길게 말 시켜 성가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민은 발딱 일어섰다. 가슴이 다급하게 뛰어댔다. 웅장한 본채에서 나무 그늘로 가려진 작은 살림집까지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민의 두 다리도 다급하게 뛰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대어 서서, 민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가 조금쯤 고약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그건 그저 위악의 가면일 거라는 생각, 두 가지가 가쁜 숨결과 함께 민에게 맴돌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실제로 고약하더라도, 위악의 가면을 즐겨 쓰더라도, 그는 그라는 것. 이정원이라는 남자……. 오랜 시간 동안을 가슴에 깊이 찍힌 화인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
"발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처음엔 그의 손길로, 다음엔 톡톡한 담요로. 내 두 발이 칭칭 감싸였다. “수안 오빠.” 그가 내 발 아래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나, 잠들었었나 봐.” “음.” “그런데, 발을 왜 이렇게 해놓은 거야?” 무의식 속에서 편안히 걸어 나온 반말 때문일까. 그가 나를 지그시 들여다본다. “따뜻하라고?” “그래.” “내 신발은?” “벗어던졌어.” “내가?” “……잠결에.” “잠결……에?” 말없이 나를 지켜보는 눈. 그의 두 눈을 마주 들여다보고 있으니, 불현듯 어떤 조각들이 반짝거린다. 한밤, 맨발로 차가운 땅을 디디며 정처 없이 헤매 다니는 나. 악몽에서 깨어나 돌아오면, 온통 시리고 아프던 발과 몸. 그 때 지금처럼 이렇게 지키듯 내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었지. “괜찮아.” 모래투성이의 두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시리지 않게 폭신한 양말을 신겨주고, 침대에 가지런히 눕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 덮어주면서, 다시 한 번. “괜찮아.” 아슴푸레한 기억이 현실과 겹쳐지며 목으로 울컥 울음이 차오른다. “수안 오빠. 언젠가, 나, 이런 적, 있었던 것 같아.” 그러나 꿈결이라기엔 너무도 선연한 그 정경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도 지금처럼, 수안 오빠가 나를, 이렇게 지켜보…….” “그런 적 없어.” 그의 목소리는 단호함을 넘어서서 꾸짖듯 호되다. 그는 눈길조차 내게서 떼어내 버렸다. 매몰차게. “있어, 있었…….” 급발진. 내 말을 삼키고서 차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나를 데리고 으르렁거리듯 앞으로 달려가는 차. 점점 흐려지는 억새밭, 바다, 그리고 하늘.나는 그가 덮어준 담요를 얼굴로 바짝 끌어올렸다.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이안류』."
동백꽃, 그리고 파도 소리에 둘러싸인 빛과 고요를 품은 작은 섬. 그곳에 비밀에 싸인 그녀, 서니은이 발을 디뎠다. “우리는 온도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사이 같아요.” 햇빛이 찬란한 바닷가 도시 은파, 그 속의 오렌지 하모니카. 그곳에 상처를 간직한 그, 장유번이 다시 흘러들었다. “잘 그린 수묵 담채화라고 정정하죠.” 우연인 듯, 운명인 듯 가슴에 깊이 박힌 ‘상처’라는 공통점이 서로를 속절없이 끌어당겼다. “그럼 다시 시작해요. 나랑 같이.” 어둠과 대비되는 유리 저편의 세상은 온갖 빛들로 찬란했고 유번의 시야에는 오로지 니은만이 환했다. 이곳 은파에서 나에게 선물은 이미 너, 서니은.
"매일 밤 12시는 준희에게 그가 허용되는 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든 시간. 준희는 마치 꿈처럼 시작되는 한 세계의 열림을 보고 있었다. 아득한 절벽 위에서 외줄을 타듯 위태롭지만 또한 향기로운 느낌으로. 두렵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 사랑도, 당연하지 않은 삶의 방식도, 당연하지 않은 시간들도. 한 여자가 가슴 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느 밤, 비가 거칠게 쏟아져 내리던 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서서 그녀는 내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비에 흠뻑 젖은 그녀의 두 발이 안타까웠다. 그 밤이 지나고도 그녀는 내내 나를 맴돌며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바라봄의 의미를 알았지만 그뿐, 내가 다가갈 수는 없었다. 다시 비가 쏟아지던 날, 비를 맞으며 내게로 온 그녀. 내 손바닥 위에 이름을, 마음을 그려 넣으며 미소 짓던 그녀. 그래서 그 여자는 내게 기억이 되었다. 기억……버릴 수 없는."
그가 홍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이 올라왔다. 귀와 머리칼에 부드럽게 스쳤다. “간지러워.” 홍주는 웃으며 몸을 조금 틀었다. “움직이지 마.” 그가 말했다. 홍주는 숨을 멈추었다. 온몸이 바짝 얼었다. 아니, 얼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냥……숨을 쉴 수도 없게 아찔한 느낌. 혹은 그리움을 닮은 안타까움. 경욱이 지극히 섬세한 손길로 귓불을 더듬어 귀고리가 들어갈 길을 찾았다. “여기다.” 마침내 귀고리가 제 길을 찾아 파고들어왔다. 홍주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몸 어딘가에서 차르르 차르르 풀잎들이 몸을 떨었다. “예쁘다, 연홍주.” 그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그는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귀를 만지던 손길도 다시 제자리에. 그러나 홍주는 여전히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가장 투명한 빨강』
반짝반짝 작은 조약돌 같은 아이, 내 서리야. 네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눈 속에, 머릿속에, 마음속에 자꾸만 들어차 버리는 너 때문에, 너의 부신 웃음을 그냥 맑게만 바라볼 수가 없어질까 봐. 몸과 마음의 경계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릴까 봐. 사랑을, 애타는 손길을, 미친 열망을 참고 또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내게만 털어놓는 속마음, 네게만 들려주는 노래 속에서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언어는 노랫말로 태어나고, 나는 너무도 자연스레 둘만의 세상을 소망하고 말았다. 오롯이 너만 바라보는 나, 오롯이 나만 바라보는 너의 세상을. 내 돌, 내 서리야. 너의 모든 저녁에 나를 살게 해 줘. 너의 저녁에 나를.
책 바보 반달곰 앞에 악어가 나타났다! 이 순간 어둠이 이토록 다정한 이유는 곁에 있는 사람 때문이다. 같이 있어서 좋은 사람. 같이 있어야 더 좋은 사람. “지금부터 반다을의 모든 시간은 권석주에게 속한다.” 이것은 두근거림일까, 두려움일까. 석주는 다을의 눈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포획된 손도, 손바닥에 누른 입술도, 직선으로 꽂힌 눈빛도, 어느 것 하나 다을은 피하지 않았다. 오롯이 석주에게 속해 있었다. 손바닥에서 입술을 떼어 내자, 다을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석주는 물러가려는 손을 끌어당겨 손깍지를 꼈다. 깊이.
초록이가 한 번씩 일으키는 큐브 폭발. 큐브 같은 이 남자에게도 좀 저질러봤음 좋겠다. 폭발한 큐브 조각들이야 낱낱이 주워 모아 원래 상태로 재조립이 가능하지만, 이 사람은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긴 하다. 그렇지만 만약, 스스로 폭발해버리면? 담배 냄새를 맡고 확 돌아버릴 수도 있듯이, 무언가로 인해 팡 폭발해버린다면? 그땐 이 사람 걷잡을 수 없어질까? 궁금하다. 그럴 그의 모습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폭발시킬 그 어느 순간이. - 그린의 곰곰 -? 이따금 무슨 상상으로 아른아른 넋을 놓고 있는지. 깊은 잠에 빠졌을 때는 어떤 모습이 되는지. 한밤 내내 베갯머리를 적시는 꿈은 또 얼마나 고운지. 아침에는 어떤 얼굴로 눈을 뜨는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떠올리는지……. 알고 싶다. 알고 싶다. 알고 싶다……그 여자를. - 정효의 곰곰 -?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곰곰, 하는 중입니까?』.
"나랑 살게 되면." 그런 말 하는 당신, 어쩌려고 그래요. 나 정말 그런 욕심 생기면 어쩌려고. 당신에게 그런 욕심 품게 되면 나 정말 나쁜 여잔데. 거기까지 욕심 품으면 지금 이 행복도 빼앗길 것 같은데. 그래서 불안해지는데. 어쩌려고 당신 그렇게 말해요. 나, 당신한테 그만한 가치 지닐 수 없는 여잔데. 당신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나, 슬픔 같은 거 모르고 살았을까. 마냥 행복만 하고 살았을까. 당신, 조금만 더 일찍 내게로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기다려, 당신. 내가 데리러 갈게.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절망은 하지 마. 다 괜찮아. 당신만 무사하다면 나는 다 괜찮아. 당신 몸, 당신 마음,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지만 않고 무사하다면. 어떤 일이 있었대도 괜찮아. 당신만 내게 오면 돼. 당신만 돌아오면 돼. 그러면 나, 다시는 당신 손 놓지 않을게. 다시는 당신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거기가 어디든 가만히, 기다려. 기다려 정임아. 정임아……. 아파서 아파서…… 그래서 사랑인가 보다.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겨울사랑』
오랫동안 내가 모르게 나를 사랑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제 내게 걸어옵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내 마음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내 안의 그가 하염없이 깊어졌습니다. 오래도록 가만히 지켜만 보며 홀로 마음을 길러왔습니다. 그녀가 떠나던 날, 고이 간직해온 내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고통스런 부재의 세월을 지나 다시 그녀 앞에 섰습니다. 나를 보며 웃는 그녀……. 처음으로 뼈가 저리게 행복합니다. 악연도 감히 거스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김지운의 로맨스 중편 소설 『폭설』.
정체 모를 남자의 은밀한 제안. 그 남자를 만나는 목요일, 오후 4시. “알고 싶어, 너를.” 그 비밀스러운 순간들을 세세히 듣고, 알고 싶어진다는 것에 세연은 막막한 두려움을 느꼈다.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잘 알게 된다는 것, 그럼으로써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 그런 과정들 뒤에는 필연적인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를 이해하게 되어 버릴지 모르니까. ‘세상 모든 걸 등진 채 당신의 심장에 이마를 대고 싶어져.’ 하루도 미뤄 둘 수 없는 마음, 그게 무엇이든 좋았다.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 해도 지금은 좋았다. 열 번의 목요일 두 개의 열쇠 그리고 한 권의 다이어리, 목요일에 만나면.
"여운이 안전벨트룰 풀어내고 막 차문을 열려는 찰나, ""지여운.""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여운에게 숨은 나직한 한 마디를 건넸다. ""Happy birthday"" "
"강은 미요의 턱을 치켜들었다. 미요의 눈빛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강을 또렷이 쳐다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불꽃처럼 맞붙었다. “내가, 관심 가져주길 바라?” 낮고 서늘한 강의 음성이 동굴 저 너머까지 깊숙이 울렸다. 잠시 버티던 미요가 입술을 열었다. “바란 적 없어요.” “거짓말하지 마.” 말은 차갑게 내려치는데, 몸속은 열기로 들끓었다. 몸의 가장 중심으로 모든 피가 몰렸다. “거짓말…… 안 해.” “하고 있잖아, 지금.” “아니야.” “맞아.” 흔들림 없이 강을 쳐다보던 미요의 두 눈에 촉촉한 그늘이 어렸다. 강이 처음 이름을 말해주던 때 그러했듯이.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은데도 그래지지가 않는다. 피, 때문이다. 이미 뜨겁게 달구어진 피. “나를…… 원해?” 미요는 그늘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말해. 말해봐.” “만일, 원한다면요?” “그렇게 말고, 제대로.” 촉촉한 응시를 유지하던 미요가 단단히 끊어 말했다. “원한 적, 없어.” “거짓말하지 말랬어.” “당신이야말로.” 미요의 입술이 움직이는 매 순간순간마다, 강의 피가 미쳐 날뛰었다. 날뛰는 피를 억누르려 강은 미요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얼굴이 뒤로 약간 젖혀져 내리깔린 미요의 속눈썹이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을 비스듬히 쏘아보며 미요가 속삭였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강은 미요의 입술로 입술을 내렸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으므로 미요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졌다. 숨결은 강에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당신이야. 나를 원하는 것도, 지금 내 입술을 갖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것도. 강…… 당신."
내게는 당신이 나무인걸요. 오랜 세월 변함없이 나를 지켜온 나무. 내 곁에 서서 사랑으로 나를 키워온 나무. 내가 죽는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당신, 나무 같은 사람. 당신은…… 내 가슴속에 깊게 뿌리를 내린 한 그루의 나무예요. 너무도 소중한…… 내 마음의 나무.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연지』
"사람이, 굳이 날 지목해서 부른 이유가 뭐예요?” “사진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요.” 그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농담을 즐기시는군요.” “농담 아닌데?” “사진 잘 나온 거랑 인터뷰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잘 나온 게 아니라, 예쁘게 나왔다고 했어요.” “그래서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려구요. 실물이랑 대조해서. 정말 예쁜가, 아님 내가 사진을 너무 잘 찍은 건가.” 치아를 드러내며 그가 밝게 웃었다. 베란다를 넘어들어온 햇빛이 그의 웃음처럼 환했다. 윤희는 부신 빛을 피하듯 시선을 그의 뒤편 벽으로 던졌다. 그에게서 번져 나오는 밝음이 어쩐지 두려웠다. 결코 경박하지 않은 그 밝음, 산란하는 빛을 닮은. “그래, 확인작업은 대충 끝났나요?” 윤희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요?” “아까 말했잖아요.” “무슨……?” “달팽이.” “예쁘단 소린 아니군요.” “그렇게……단단한 껍질로 꼭 감싸서 지켜야 할 게 대체 뭔가. 그게 궁금해지려는 중이에요.” 나직나직 흘러나오는 그 말들은 혼잣말 같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막막한 불안감이 윤희에게 다가들었다. 무언가……어둡거나 위협적인 느낌은 분명 아닌데, 마음을 휘젓는 두려움 혹은 불안. 그 정체를 명확히 알 수가 없어 더욱 그러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윽고 그가 명쾌한 목소리로 결론을 냈다. “예쁜 달팽이, 라고 해 두죠. 서윤희라는 여자.” 윤희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한가한 바람, 이라고 해 둘게요. 이연우라는 남자.” 씩 웃는 그의 표정에 악동의 그림자가 비쳤다. 비밀스러운 어떤 일을 모의하듯 그가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시작한 거네?” “인터뷰 말이에요?” 그 소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윤희는 그렇게 받아 되물었다. “아니, 여자와 남자. 서로서로 그렇게 바라봤으니까 시작한 거란 얘기.”"
“누구?”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명품 조각상 같은 남자가 물었다. “면접 보러 왔는데요.” 남자가 책상을 양팔로 짚고는 느긋하게 기대어 섰다. “다른 알바 같은 것들 다 그만둔다면, 정규직으로 채용하겠어.” “아직 이력서도 안 보셨거든요?” “여기서만 일하겠다면, 고은채 씨가 필요한 만큼 맞춰 주지.” 남자가 책상에서 몸을 떼고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움켜쥐는 게 내 특기야.” 그는 이미 저만치 뒤로 물러나 책상에 기대어 선 채 나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머릿속에 경고 등이 반짝 켜졌다.
나는 당신의 숲. 당신은 내 숲에 영원히 머무를 숨결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채집하는 거로군.” 시간을……채집한다? “가장 아름답게 살아 있을 때의 시간을 채집하여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 지완의 말이 진서에게 특별한 느낌으로 안겨왔다. 생의 어떤 순간들도 꽃처럼 채집할 수 있다면, 잘 말려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다면……. 그러면 나는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던 어린 날의 새벽, 그 순간을 제일 먼저 채집할까 봐요. 산에 갈래? 담담하게 건너오던 그 목소리랑.
"“사실은 아까부터 내내 연습했는데, 잘 안 돼요.” “뭐가.” “이름요.” “누구 이름.” “이……레도.” 가슴 안에 예리한 아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레도는 무심히 물었다. “왜.” “잘, 모르겠어요. 어떤 느낌인지.” “느낌?” “가슴에 담기는 느낌 같은 거요. 그게 분명해야 거기 어울리는 글씨체로 쓸 수가 있는데, 레도 오빤 잘 모르겠어요. 어떤 느낌인지, 어떤…… 사람인지.” 마음의 결들이 올올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을 꽁꽁 묶으며 레도는 차갑게 말했다. “알려고 하지 마.” "
반짝반짝 작은 조약돌 같은 아이, 내 서리야. 네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눈 속에, 머릿속에, 마음속에 자꾸만 들어차 버리는 너 때문에, 너의 부신 웃음을 그냥 맑게만 바라볼 수가 없어질까 봐. 몸과 마음의 경계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릴까 봐. 사랑을, 애타는 손길을, 미친 열망을 참고 또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내게만 털어놓는 속마음, 네게만 들려주는 노래 속에서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언어는 노랫말로 태어나고, 나는 너무도 자연스레 둘만의 세상을 소망하고 말았다. 오롯이 너만 바라보는 나, 오롯이 나만 바라보는 너의 세상을. 내 돌, 내 서리야. 너의 모든 저녁에 나를 살게 해 줘. 너의 저녁에 나를.
1권 “내키진 않지만, 제게 주어진 독배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독배라…….” 이카로스의 멤버 율과 직원 서재이 사이에 터진 스캔들. 이 사태의 가장 확실한 해결 방법은 자신과의 결혼이다. “싫어하진 않아.” 서로에게 감정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말이 가슴을 찌르는지. 자연스러운 서재이의 우리, 라는 말에 굳게 잠긴 마음의 문이 열리는지. 마음에도 무게 중심이 있다면. 옮겨 가고 있었다. 서재이에게로, 시나브로. 재이 마음에도 무게 중심이 있다면. 옮겨 오고 있기를. 시나브로, 손무영에게로. “한자로는 숫자 0의 의미는 아닌데.” “저도 2는 아니에요. 그래도 재밌잖아요.” 0이었던 무영이, 재이를 만나서, 2가 되었다. 2권 “3과 4를 위하여.” 0이었던 무영이 재이를 만나 2가 되고, 다시 3이거나 4가 되어 가족을 이루는 것.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 더 생겨서 좋았다. 외로움의 자리가 그 사람의 무게만큼 줄어들었다. “언제나 우선순위는 우리, 우리 둘. 다른 사람은 그다음으로 두는 거야.” “서재이의 최우선 순위는 손무영. 이제부터는 꼭 그럴 거예요.” 무영의 마음, 그 올곧은 진심이 가슴을 두드렸다. 손무영이라면, 손무영이라서 가능한 것들. “웃고 있다, 서재이.” “응, 웃고 있어요.” 앞으로 펼쳐질 무대가 몇 막, 몇 장일지, 그 모든 무대들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무자비한 모든 날들에 축배를.
〈강추!〉나랑 살게 되면. 그런 말 하는 당신, 어쩌려고 그래요. 나 정말 그런 욕심 생기면 어쩌려고. 당신에게 그런 욕심 품게 되면 나 정말 나쁜 여잔데. 거기까지 욕심 품으면 지금 이 행복도 빼앗길 것 같은데. 그래서 불안해지는데. 어쩌려고 당신 그렇게 말해요. 나, 당신한테 그만한 가치 지닐 수 없는 여잔데. 당신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나, 슬픔 같은 거 모르고 살았을까. 마냥 행복만 하고 살았을까. 당신, 조금만 더 일찍 내게로 왔더라면. 그랬더라면……. 기다려, 당신. 내가 데리러 갈게.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절망은 하지 마. 다 괜찮아. 당신만 무사하다면 나는 다 괜찮아. 당신 몸, 당신 마음,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지만 않고 무사하다면. 어떤 일이 있었대도 괜찮아. 당신만 내게 오면 돼. 당신만 돌아오면 돼. 그러면 나, 다시는 당신 손 놓지 않을게. 다시는 당신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거기가 어디든 가만히, 기다려. 기다려 정임아. 정임아……. 아파서 아파서…… 그래서 사랑인가 보다.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겨울사랑』 제 1권.
"이나는 살그머니 문을 밀어 열었다. 커튼이 드리워져 적당히 어두운 방 안, 남자는 다리를 길게 뻗은 채 침대 헤드에 몸을 반쯤 기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새 잠이 든 건가? 이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침대 곁 협탁에다 죽 쟁반을 올려놓았다. 고개를 들이밀고 탐색이라도 하듯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감겨 있는 남자의 눈 대신 짙은 눈썹이 이나를 마주 보았다. 이나는 제풀에 움찔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생동감 있는 눈썹을 마주 대하니 어쩌면 잠든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침 식사를…….” 말이 채 끝맺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또렷이 긴장되는 느낌. 시선이 맞부딪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어렵다던 호준의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나는 듯했다. 눈 감고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도 앞에 선 사람을 잔뜩 긴장시키는 저 서늘한 기운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나는 궁금해졌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눕지. 이러고 어떻게 쉰담.” 이나의 가만한 중얼거림에 그가 눈을 떴다. 눈길이 마주쳤다. 마음이라든가 감정이라든가, 그러한 것들을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깊은 눈동자였다. 피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나가 먼저 눈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아침을 가져왔…….” 이나의 말은 중간에 잘렸다. “나가.”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비정한 명령의 어조. 그 어조가 이나의 가슴을 싸늘히 내리그었지만 주눅 들지 않으려고 이나는 굳이 대답을 했다. “네.” 그리곤 돌아서서 서너 걸음 걸어 나오던 이나는 흡, 숨을 멈추며 그 자리에 섰다. 우리말을 하네! 나가, 라는 그 명령은 분명 한국어였다. 이나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남자는 이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공허하고 차가웠다. 이나라는 한 인격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방 안에 구비된 가구들 중 하나를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게 떨리다가 툭 내려앉았다. 가슴속 떨림과 내려앉음을 애써 부인하며 이나는 꼭 한 걸음만 앞으로 떼어놓았다."
정체 모를 남자의 은밀한 제안. 그 남자를 만나는 목요일, 오후 4시. “알고 싶어, 너를.” 그 비밀스러운 순간들을 세세히 듣고, 알고 싶어진다는 것에 세연은 막막한 두려움을 느꼈다.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잘 알게 된다는 것, 그럼으로써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 그런 과정들 뒤에는 필연적인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를 이해하게 되어 버릴지 모르니까. ‘세상 모든 걸 등진 채 당신의 심장에 이마를 대고 싶어져.’ 하루도 미뤄 둘 수 없는 마음, 그게 무엇이든 좋았다.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 해도 지금은 좋았다. 열 번의 목요일 두 개의 열쇠 그리고 한 권의 다이어리, 목요일에 만나면.
집에 가요. 그리고 싹 잊어버려요. 지금은 이렇게 서운한 듯 올려다보지만, 먼 훗날엔 당신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내가 이렇게 당신을 내쳐 준 것을, 당신이 내비치는 마음 한 자락 잡아채지 않고 놓아 버리는 것을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나 말고 괜찮은 남자 만나서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으며 먼 훗날엔 나 같은 놈 따윈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결정으로 고모할머니의 비서를 따라 서울에 온 크림. 아무도 반겨 주지 않은 그 집에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유예 기간, 한 달. “오늘은, 나랑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요?” 떠나왔던 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고드름 나무 같은 그를 느껴 버렸다. 그 사람의 긴 그림자가 외로움으로 담겨 버렸다. “아저씨의 소확행은 뭐예요?” 도국, 그에게 닿고 싶었다. 연결되고 싶었다. “나중에도 기억할 것 같아요. 시나몬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어 본 오늘, 이 순간을.” 이토록 다정한 봄날에 우리 시리고도 달콤한, 시나몬 아이스크림처럼.
나처럼 예쁘게 웃는 사람 처음 봐요? 어릴 적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음악만을 위해 살아온 바이올리니스트 윤미도. 그 덕에 성공한 음악가로 자리를 잡긴 했지만, 자신의 인생에 끊임없이 간섭하는 모친에게 지쳐 버린 그는 다친 손을 핑계삼아 잠시 요양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때마침 지인에게 추천받은 시골의 숙소. 마침내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망설임 없이 집을 떠난 그는 초행길인 탓인지 그만 한참이나 길을 헤매고 만다. 그러던 중, 인적이 드문 버스 정류장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 미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동그랗게 풍선껌을 터트리며 천진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왠지 모를 호기심을 품게 되는데….
금지에 대해 그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먹먹해져 왔다. 이소는 컵을 기울여 물 위에 동동 뜬 얼음 하나를 입에 머금었다.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에서 바람이 마구 달려들 때처럼 입 안이 시렸다. 눈물을 머금은 눈은 금방 표시 나지만 입은 그렇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서, 내내 그렇게 참고 있는 거야?” 참는다는 표현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아릿해진 마음으로 눈물이라도 쏟게 될까 봐 이소는 애써 고운 웃음을 지었다. “참긴 누가요. 어차피 언젠가는 고쳤어야 하는 호칭이잖아요.” “어차피.” “결혼하면, 아이도 생길 거고, 그럼 그 아이가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잖…….” “그럼 이제부턴 뭐라고 부르려고?” 정말 알고 싶어 묻는 건지, 그냥 한 번 던져보는 말인지 알 수 없어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가 다시금 물어왔다. “안 부를 거야?” 낮은 음색 속에 스며 있는 간절함의 조각 하나가 이소에게 두근거림과 용기를 함께 주었다. 단지 착각에 불과하다 해도 상관없었다. “부를 거예요.” “어떻게?” “후인.” 웃음으로 말해놓고 이소는 두 손으로 얼른 이마부터 가렸다. 그의 눈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손 내려.” “꿀밤 안 줄 거죠?” “줄 거야.” “그럼 안 내릴래.” “지금 말고 나중에. 그러니까 내려.” “나중에,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콩 때리려고요?” “그래.” “눈사람.” “눈사람?” “네, 눈사람이요. 이제부턴 그렇게 부를 거예요.” “내가, 눈사람이야?” “설……인.” 이소는 그의 이름에서 ‘설’과 ‘인’만 또록또록 발음하고 가운데 글자 ‘후’를 숨으로 내쉬었다. 그러자 그도 이소처럼 똑같이 따라 했다. “설……인.” “그래서 눈사람이에요.” “남의 이름을 왜 네 멋대로 편집해?” “싫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늘 그러하듯 묵묵히 이소를 바라보았다. 이소는 웃으며 물었다. “세 번째구나?” “가만히 있거나?” 이소의 끄덕임에 그가 조용히 웃었다.
입술로 귀를 애무하듯 하진은 한 마디 한 마디를 따뜻한 숨결과 함께 이린의 귀에다 불어 넣었다. "그 상자를 여는 순간 서이린은 내 여자가 되는 거야. 영원히." "뭐야, 지금 이거 프러포즈예요? 당신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하는 거예요?" "선택해. 상자를 열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신은 지금 당신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기로에 서 있어." "음, 그럼 생각을 깊이 해봐야겠네?" "10초 주겠어." "어휴, 인색도 해라. 고작 10초 안에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다니." "5초 남았어." "아니, 뭐 벌써 그렇게." "3초." "하진 씨." "1초." "열어요! 열면 되잖아. 연다구요." 김지운의 로맨스 장편 소설 『풀잎 연가』.
“누구?”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명품 조각상 같은 남자가 물었다. “면접 보러 왔는데요.” 남자가 책상을 양팔로 짚고는 느긋하게 기대어 섰다. “다른 알바 같은 것들 다 그만둔다면, 정규직으로 채용하겠어.” “아직 이력서도 안 보셨거든요?” “여기서만 일하겠다면, 고은채 씨가 필요한 만큼 맞춰 주지.” 남자가 책상에서 몸을 떼고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움켜쥐는 게 내 특기야.” 그는 이미 저만치 뒤로 물러나 책상에 기대어 선 채 나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머릿속에 경고 등이 반짝 켜졌다.
그가 홍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이 올라왔다. 귀와 머리칼에 부드럽게 스쳤다. “간지러워.” 홍주는 웃으며 몸을 조금 틀었다. “움직이지 마.” 그가 말했다. 홍주는 숨을 멈추었다. 온몸이 바짝 얼었다. 아니, 얼었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냥……숨을 쉴 수도 없게 아찔한 느낌. 혹은 그리움을 닮은 안타까움. 경욱이 지극히 섬세한 손길로 귓불을 더듬어 귀고리가 들어갈 길을 찾았다. “여기다.” 마침내 귀고리가 제 길을 찾아 파고들어왔다. 홍주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몸 어딘가에서 차르르 차르르 풀잎들이 몸을 떨었다. “예쁘다, 연홍주.” 그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그는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귀를 만지던 손길도 다시 제자리에. 그러나 홍주는 여전히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책 바보 반달곰 앞에 악어가 나타났다! 이 순간 어둠이 이토록 다정한 이유는 곁에 있는 사람 때문이다. 같이 있어서 좋은 사람. 같이 있어야 더 좋은 사람. “지금부터 반다을의 모든 시간은 권석주에게 속한다.” 이것은 두근거림일까, 두려움일까. 석주는 다을의 눈을 바라보며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포획된 손도, 손바닥에 누른 입술도, 직선으로 꽂힌 눈빛도, 어느 것 하나 다을은 피하지 않았다. 오롯이 석주에게 속해 있었다. 손바닥에서 입술을 떼어 내자, 다을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석주는 물러가려는 손을 끌어당겨 손깍지를 꼈다. 깊이.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민이 울음을 깨물 듯 잠시 말을 깨물었다. 민의 눈이 젖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민이 하얀 두 손으로 가슴을 열고 심장을 왈칵 움켜쥐었다 놓는 느낌이다. 정원은 가슴 속에서 실제로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통증을 감추며 정원은 서늘하게 물었다. “나를?” 민의 눈빛이 가로로 여리게 흔들렸다. 그리고 열리는 입술. “……나를.” 민의 그 언어가 정원의 심장에 들어와 유리조각처럼 박혔다. 손목을 움켜쥔 민의 손, 손등에 동그란 뼈마디가 힘겹게 돌출되었다. “민.” 네가 너를, 죽이도록 두지 않아. 결코, 그런 일은 없어. 나는, 네게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네가 내게서 사라지지 못하게 철저히 내 소유로 가지듯이.
남자에게서 결핍된 어떤 부분이 들여다보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결핍이 정서적인 영역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걸 자신의 손으로 채워주고 싶어진다면 위험의 한계치에 이르러 있다는 의미. 가슴 속에서 빨간 불이 위태롭게 반짝거렸다. 다인은 민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물을 바라보았다. 물 위로 햇빛이 내려 잔잔히 떠다녔다. 이따금 여린 바람이 귓가로 귀엣말처럼 소곤소곤 스쳐가곤 했다. 가슴 속을 불안하게 떠돌던 불빛들이 차분히 스러졌다. 그제야 다인은 민설을 돌아보았다. 순간, 다시금 가슴에 불이 켜졌다. 자신에게로 와 있는 민설의 눈빛. 언제부터였을까. 방금 돌아본 것 같지는 않았다. 제법 오래 고정되어 있었다는 느낌. 다인은 미소 짓지도 못하고 스르르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슴 안에서 하프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다.
1권 “내키진 않지만, 제게 주어진 독배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독배라…….” 이카로스의 멤버 율과 직원 서재이 사이에 터진 스캔들. 이 사태의 가장 확실한 해결 방법은 자신과의 결혼이다. “싫어하진 않아.” 서로에게 감정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말이 가슴을 찌르는지. 자연스러운 서재이의 우리, 라는 말에 굳게 잠긴 마음의 문이 열리는지. 마음에도 무게 중심이 있다면. 옮겨 가고 있었다. 서재이에게로, 시나브로. 재이 마음에도 무게 중심이 있다면. 옮겨 오고 있기를. 시나브로, 손무영에게로. “한자로는 숫자 0의 의미는 아닌데.” “저도 2는 아니에요. 그래도 재밌잖아요.” 0이었던 무영이, 재이를 만나서, 2가 되었다. 2권 “3과 4를 위하여.” 0이었던 무영이 재이를 만나 2가 되고, 다시 3이거나 4가 되어 가족을 이루는 것.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 더 생겨서 좋았다. 외로움의 자리가 그 사람의 무게만큼 줄어들었다. “언제나 우선순위는 우리, 우리 둘. 다른 사람은 그다음으로 두는 거야.” “서재이의 최우선 순위는 손무영. 이제부터는 꼭 그럴 거예요.” 무영의 마음, 그 올곧은 진심이 가슴을 두드렸다. 손무영이라면, 손무영이라서 가능한 것들. “웃고 있다, 서재이.” “응, 웃고 있어요.” 앞으로 펼쳐질 무대가 몇 막, 몇 장일지, 그 모든 무대들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무자비한 모든 날들에 축배를.
나름의 정리를 끝내고 만족스레 끄덕이는 그린에게로 정효의 시선이 붙박였다. 그린은 시침을 떼며 방긋 웃어 보였다. “뭔 생각했어?” “아무것도요.” “내 생각했지?” “무, 무슨. 눈앞에 빤히 앉혀두고 누가 그런대요? 참 내.” “너 원래 잘 그러잖아. 곰곰 중독. 그게 주특기 아냐.” “아무리 주특기라도 딴생각을 열심히 하지,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생각은 안 하거든요?” “그런가.” 저 모호한 어조라니. 믿겠다는 거야, 거짓말 말라는 거야. 초록이가 한 번씩 일으키는 큐브 폭발. 큐브 같은 이 남자에게도 좀 저질러봤음 좋겠다. 폭발한 큐브 조각들이야 낱낱이 주워 모아 원래 상태로 재조립이 가능하지만, 이 사람은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긴 하다. 그렇지만 만약, 스스로 폭발해버리면? 담배 냄새를 맡고 확 돌아버릴 수도 있듯이, 무언가로 인해 팡 폭발해버린다면? 그땐 이 사람 걷잡을 수 없어질까? 궁금하다. 그럴 그의 모습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폭발시킬 그 어느 순간이.
동백꽃, 그리고 파도 소리에 둘러싸인 빛과 고요를 품은 작은 섬. 그곳에 비밀에 싸인 그녀, 서니은이 발을 디뎠다. “우리는 온도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사이 같아요.” 햇빛이 찬란한 바닷가 도시 은파, 그 속의 오렌지 하모니카. 그곳에 상처를 간직한 그, 장유번이 다시 흘러들었다. “잘 그린 수묵 담채화라고 정정하죠.” 우연인 듯, 운명인 듯 가슴에 깊이 박힌 ‘상처’라는 공통점이 서로를 속절없이 끌어당겼다. “그럼 다시 시작해요. 나랑 같이.” 어둠과 대비되는 유리 저편의 세상은 온갖 빛들로 찬란했고 유번의 시야에는 오로지 니은만이 환했다. 이곳 은파에서 나에게 선물은 이미 너, 서니은.